단정한 슈트 속에 숨겨진 잔인함과 비열함, 섬뜩한 살수 역으로 돌아온 배우 이범수(44)를 만났다. 실제로 만난 이범수는 배려 넘치는 매너와 진중한 목소리로 자신의 생각을 털어놨다. 망설임 없이 자신의 연기와 영화 ‘신의 한 수’(감독 조범구)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는 분명 매력적인 배우임에 틀림없어 보였다.
“‘신의 한 수’는 제작진을 비롯해서 다들 뻔한 영화가 되지 않으려고 부단히도 노력했어요. 우리나라도 외국영화도 뻔하면 관객과 멀어져요. ‘신의 한 수’가 한국 대표로 ‘트랜스포머4’와 조우할 수 있어 기쁘게 생각하고 기대해주길 바라요. 자신 있으니까 조우하는 거죠.(웃음) 저희는 오락영화예요. 파티장 가면 얼음으로 백조가 조각되어 있어요. 몇 시간 지나 녹아 없어지는 건 아깝지만 백조의 용도는 장식용이에요. 그 자체로 훌륭한 거예요. 저희 영화는 태생부터가 오락영화죠. 살수가 왜 악한 놈인지 그런 걸 설명할 필요는 없어요. 저런 악한 놈한테 걸려서 복수를 하게 되는 오락액션 영화로 봐주시면 가장 정확할 것 같아요.”
◆ 매력적인 악역, 살수가 되기 위한 노력들
이범수는 ‘신의 한 수’의 살수가 독특하고 새로운 악역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꼭 하고 싶었다고. 하지만 그런 만큼 살수는 부담스러운 캐릭터였다. 영화 ‘짝패’에서 악역을 맡아 인상적인 연기를 펼쳤기에 비슷한 캐릭터의 재탕이 되지 않기 위해 고민도 많이 했다. 영화 속 살수는 대사가 많지 않은 캐릭터였고, 연기적으로는 오히려 절제해야했다. 대사로 보여줄 수 있는 게 많지 않았기에 연기적인 측면으로 호기심이 생겼다. 이범수는 말없이 느낌만으로 악함을 잘 표현해내고 싶었고, 배우로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단다.
“흔히 볼 수 있는 욕설에 사투리에 무지막지하고 단순 무식한 인물도 매력 있지만 살수는 그런 인물은 아니에요. 다른 악을 어떻게 표현할까 고민했죠. 단정하고 깔끔하고 예민하고 정갈해 보이지만 그 정갈함 속에 차가움을 가지고 있어요. 그런 모습에서 폭발적으로, 폭력적으로 돌변하는 그런 인물이 되고 싶었어요. 머리도 단정하게 빗고 예민해 보이는 무테안경으로 차가움을 표현했죠. 살수가 말이 많은 인물이 아니라서 눈으로 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표현하려고 했어요. 액션에서도 파워풀한 모습보다는 팔을 쓰고 간결하고 민첩하게 움직여요. 빠르고 동물적인 감각의 소유자로 표현하기 위해 신경을 많이 썼어요.”
이범수는 바둑을 처음 두는 사람처럼 보이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바둑 두는 동작을 계속해서 연습했고, 살수 캐릭터를 위해 남들이 잘 쓰지 않는 손가락으로 바둑 두는 것을 감독에게 직접 제안하기도 했다. 촬영 현장에서 조범구 감독은 배우들의 의견을 존중해줬다. 이범수는 감독의 배려 덕분에 영화 촬영을 즐겁게 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렇기에 더욱 악랄하고 매력적인 악역이 탄생할 수 있었다고.
“살수는 깔끔한 양복을 입고 있어요. 전신문신을 제안한 이유는 살수도 벗겨놓으면 ‘결국엔 깡패다’라는 느낌을 주고 싶었어요. 야쿠자들이 온몸에 왜 문신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아픈 문신을 하는 것은 자신의 독함을 보여주기 위해서일수도 있고, 그런 외형적인 모습에서 위압감과 폭력성을 시각적으로 과시하는 느낌도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살수 또한 깔끔하고 정장을 입지만 그런 인간이라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고, 일반인이 아닌 포인트를 주고 싶었어요. 전신문신 장면에서 이시영씨가 부끄러웠다고 하셨는데 그렇게 말하는 것을 보고나서 그렇게 느낄 수 있겠구나 싶었어요. 저는 촬영할 때 수영복 입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고 부끄럽다는 생각을 못했어요. 생각하기에 따라서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은 들더라고요.”
◆ 우아한 바둑 속에 감춰진 칼을 꽂는 결단
이범수는 악역이 주는 매력에 대해 “극단적인 캐릭터와 종횡무진 할 수 있다”는 점을 꼽았다. 그는 살수란 인물이 매력적인 것은 시작부터 끝까지 긴장감을 가지고 가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악이 별 볼일 없으면 흥미가 떨어진다는 것. 형의 죽음, 억울한 옥살이, 그래서 복수를 하고자 하는 태석(정우성)이 절대 악으로 군림하는 살수와의 대결이 빅매치가 되고 기대가 될 수 있도록 긴장감을 유지하고 이끌어 가기 위해 고민했다. 그래야 ‘신의 한 수’ 전체의 게임이 흥미로울 수 있다고 생각했단다. 특히 개인적으로 바둑신도 좋았다고.
“바둑신은 현장에서 나오기도 했죠. 책으로 읽을 때보다 매력적으로 와 닿았어요. 사실 바둑알을 내려놓을 때 부드러운 스냅이나 점잖은 행동이 무용의 춤사위 같은, 살아있는 곡선으로 보이지만 이 자체가 상대방의 심장에 칼을 꽂는 결단이에요. 내가 웃고 있지만 웃는 게 아니죠. 이들은 우아하게 바둑을 두고 있지만 머릿속으로 수십 번 칼이 오고 가요. 그런 것들이 읽혀져서 흥미로웠죠.”
배우 정우성과의 촬영은 즐거웠다. 1998년 영화 ‘태양은 없다’에서 만난 후 2000년 영화 ‘러브’로 호흡을 맞춘 두 사람은 13년 만에 ‘신의 한 수’로 다시 만났다. 이범수는 각자의 위치에서 열심히 일하다가 만나 옛날이야기를 할 수 있어서 무척 반가웠다고. 특히 정우성과 함께한 마지막 액션 신도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또한 살수가 죽을 때 잔가지 없이 깔끔하게 끝나서 좋았단다.
“마지막 액션신에서 새끼손가락 다친 것 말고는 없어요. 연습도 많이 했고 촬영하는 순간에는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집중을 하니까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라요. 과거에 다른 작품을 할 때 느꼈어요. 배우는 연기할 때 약간은 자기 플러스 알파가 있어요. 고층건물에서 난간도 없는 곳에서 와이어 줄도 없이, 보호 장비도 안하고 촬영한 적이 있어요. 촬영 할 때는 몰랐는데 끝나고 메이크업 지우고 30분 전에 서있던 자리를 보는데 아찔하더라고요. 아까는 어떻게 서 있었을까 싶었죠. 촬영할 때는 극중 인물이 돼 있던 거예요. ‘레디 액션’이라는 사인이 오면 그 인물로 존재한다는 게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 "김재중-임시완, 겸손하고 노력하는 모습 예뻐"
이범수는 지난해 12월 신한대학교 공연예술학과 학과장으로 임용됐다. 현장에서 연기를 하고 있기에 연기를 배우고 싶어 하는 학생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신념과 애정으로 교단에 섰다. 2011년 SBS '기적의 오디션'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진심으로 오디션 참가자들에게 발전과 자극을 주고 싶었단다. 지금도 참가자들과 연락을 주고 받는다고. 현재 MBC 드라마 ‘트라이앵글’에서 그룹 JYJ 멤버 김재중과 제국의아이들 멤버 임시완과 호흡을 맞추고 있는 이범수는 후배 연기자에 대한 애정도 드러냈다.
“지금 함께 연기하고 김재중과 임시완은 겸손하고 진심으로 노력하고 배우려고 해요. 특히 재중이는 워낙 성실해요. MBC 드라마 ‘닥터진’때부터 느꼈어요. 힘들어도 힘든 내색 안 하고 차분하고 그러니까 예쁘죠.(웃음) 시완이도 그렇죠. 이번에 처음 알게 된 친구인데 착하고 생각도 어른스럽고 열정도 많아요.”
이범수는 KBS2 드라마 ‘총리와 나’ ‘트라이앵글’과 영화 ‘신의 한 수’로 활발하게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연기 선생님으로 배우를 꿈꾸는 후배들과도 끊임없이 교류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금연영화 감독으로 연출에도 도전했다. 이범수는 연기가 좋고 재미있기에 앞으로도 부지런히 계속하고 싶다고 말했다. 특히 연출도 계속해보고 싶은 바람을 숨기지 않았다.
“거창하게 도전이라기보다는 취미라도 연출을 계속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건 매력적이죠.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잖아요. 감독이 하고자하는 이야기를 하고, 배우는 소중한 도구라고 할 수 있죠. 배우가 있어야 표현이 되니까. 학창시절 연극을 두 작품 연출하기도 했어요. 작년에 그런 기회가 주어져서 자의반 타의반 금연영화를 찍었어요. 이참에 떠밀려서 해봐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고 꼭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만큼 성장한 것 같고 또 해보고 싶어요. 가을에 또 계획이 있어요.”
1990년 영화 '그래, 가끔 하늘을 보자'로 배우로 데뷔한 이범수는 어느새 믿고 보는 배우가 됐다. 코믹 연기에서부터 악역까지. 완벽하게 자신이 맡은 역할을 소화해내는 그는 배우로 살아서 행복했다고 전했다. 이범수는 마지막으로 앞으로도 열심히 하는 배우가 되고 싶다고 밝혔다.
“돌이켜보면 행복해요. 배우를 했기에 많은 분들한테 박수도 받을 수 있었고, 제 목소리를 낼 수도 있었죠. 감사해요. 이제 나이가 다른 일을 한다고 해도 성숙 되어가는 단계잖아요. 지금은 어떻게 작품을 하는 게 성숙하고 어른스러운 행보일까 고민하죠. 한 분야에서 20년 넘게 하고 있다면 그만큼 어른스러운 행보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역사책에서도 장군들은 목숨을 걸잖아요. 저도 명예를 걸고, 모든 것을 걸고 열심히 하고 싶어요.”(사진=영화 '신의 한 수' 스틸 컷)
한국경제TV 양소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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