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점토로 불국사 석가탑과 다보탑 만들기에 도전했다. 신라 시대의 문화유산을 직접 만들어 보고자 하는 시도는 몇 시간에 걸친 좌절과 함께 소박한(?) 결과물로 끝났다.
실제 탑의 사진을 보고, 위층과 아래층의 비율까지 재 가며 똑같이 재현하려고 애를 썼지만 초등학생의 손끝은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따라가지 못했다. 하지만 20여 년 뒤인 지금, 3D 프린터라는 '재주꾼'이 등장해 어린 시절의 소망에 실현 가능성을 더해 주고 있다.
3D 프린터란, 말 그대로 손에 쥘 수 있는 물건을 프린트한다는 프린터이다. 종이에 평면적인 인쇄만을 하던 프린터가 입체적인 물건까지 만들 수 있게 진화한 것이다. 석가탑과 다보탑도 3D 모델링만 있으면 쉽게 뽑아낼 수 있다.
3D 프린터라는 용어를 낯설어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생각보다 3D 프린터는 다양한 방면에서 이미 재주를 부리고 있다. 최근 등장한 3D 프린터의 혁혁한 성과들을 모아 봤다.
★'우리집 DIY 가구' 3D 프린터로 뽑았지~
흔히 DIY 가구라고 하면 '뚝딱뚝딱'을 연상한다. 기존의 DIY 가구는 목재나 플라스틱 등 가구 소재를 직접 사서 조립하고, 못을 박아 땀 흘리며 완성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것도 옛말이 될지도 모른다. 독일의 3D 프린터 회사 빅렙은 최근 가로, 세로, 높이 100×114.7×118.8 센티미터의 가구를 찍어낼 수 있는 3D 프린터 '빅렙 원'을 선보였다. 빅렙 측은 빅렙 원의 홍보를 위해 홈페이지에 직접 가구를 찍어내는 과정을 담은 영상을 공개했다.
영상에서는 이 신기한 프린터가 우아하면서도 표면의 무늬부터 아주 복잡한 오렌지 컬러의 탁자를 상판부터 차례차례 만들어 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곡선이 유려한 탁자가 완성되는 과정을 보면 탄성이 절로 나온다.
빅렙에 따르면 가구를 만드는 3D 프린터인 만큼, 다양한 질감의 재료 9가지를 골라 다양한 소재로 DIY 가구를 만들 수 있다. 3D로 디자인만 하면 프린터가 가구를 뽑아 주니, 조금만 기술을 배우면 집안 공간과 취향을 모두 만족시키는 가구를 산다고 돌아다닐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손상받은 뼈까지 복원한다
'3D 프린터'라는 말에 시사에 관심 있는 사람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의료'이다. 그만큼 3D 프린터는 의료 분야에 무궁무진한 응용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임플란트, 의족, 보청기 제작 등 수많은 분야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눈길을 끄는 것이 신개념 안면 조소술인 '3D FIT'이다.
3D FIT은 3D 프린터 기술을 접하기 어려운 국내에서 이미 개발돼 다양하게 응용되고 있는 기술이다. 일반 사람들에게 가장 관심이 많은 미용 분야여서 더욱 그럴지도 모른다.
사람의 뼈는 하나하나가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조각품이다. 타고난 그대로의 뼈든, 불의의 사고로 손상을 입은 뼈든 남과 완전히 다른 자기만의 윤곽이라는 점은 똑같다.
기존의 안면골 복원 수술에서는 이처럼 남과 완전히 다른 개인의 뼈 모양에 딱 맞는 보형물을 만들기가 불가능했다. 환자의 뼈 모양에 최대한 맞춰 의사가 자신의 감과 경험을 믿고 '어림짐작 조각'하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같은 수술은 손상받기 이전의 모양으로 완전히 복원되지 않기 때문에 환자의 불만족은 물론 보형물의 이탈 등 심각한 불안요소를 안고 있었다.
3D 프린터를 이용한 '3D FIT'은 이와 같은 불안요소를 완전히 없앴다. 환자의 CT 자료를 그대로 3D 모델링하고, 이를 3D 프린터로 뽑아내 환자의 골격을 눈 앞에 그대로 재현한다.
이 골격에 맞춰 보형물을 제작하면 실제 수술에서도 이탈이나 모양에 대한 걱정 없이 환자에게 딱 맞는 보형물을 만들 수 있다. 물론, 환자가 미리 보형물을 보고 의견을 제시할 수도 있으니 수술 실패의 위험은 더 적어진다.
★음악만 있으면 레코드판도 '프린트'
3D 프린터가 찍어낼 수 있는 것은 '유형의' 물건들뿐이 아니다. 형태가 없는 음악마저도 3D 프린터의 대상이다. 지난해 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가 세계 최초의 3D프린팅 LP 판을 제작하는 데 성공해 화제를 모았다.
아만다 가세이(Amanda Ghassaei)라는 이름의 이 엔지니어는 음악 파일을 LP 판 만들기에 필요한 도면으로 변환해 주는 소프트웨어를 먼저 만들고, 이를 통해 제작한 도면을 스트라타시스의 고해상도 3D 프린터로 찍어내 LP 판을 제작했다.
지난해 말에는 이 방법에 기초해 영국의 록 가수 켈리 오케릭(Kele Okereke)이 3D 프린터로 제작된 LP 판을 내놓는다고 알려져 다시 한 번 화제를 모았다.
음악만 있으면 소프트웨어를 통한 변환으로 LP 판을 제작할 수 있는 이 기술에는 긍정적인 면이 많다. 아티스트들에게 소프트웨어와 장비가 보급된다면 정식 앨범 제작보다 쉽게 자기만의 앨범을 만들어낼 수 있다. 일반인들이 좋아하는 곡을 골라 레코드를 만드는 것도 손쉬워진다.
그러나 기술이 성공적으로 보급될 경우 저작권이 있는 음원을 무분별하게 LP 판으로 찍어내 남용할 가능성도 있어, 앞으로의 대비책 또한 함께 발전해야 하는 상황이다.(사진=빅렙, 인스트럭터블)
한국경제TV 이예은 기자
yeeuney@wowtv.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