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부터 연기를 해온 이들에게 우리는 ‘잘 자랐다’는 표현을 쓴다. 그 말에는 여러 가지가 담겨져 있다. 대체적으로 키가 많이 컸을 때, 얼굴이 예뻐졌을 때, 그리고 연기력이 좋을 때 쓴다. 배우 심은경(20)은 이 중 어디에 해당될까 곰곰이 생각을 해봤다. 역시나 세 가지에 모두 부합한다. 그런데 이상하게 섭섭하다. 그래, 심은경에게는 또 다른 매력 한 스푼을 추가해본다. 단단한 마음가짐. 그래서일까. 심은경은 영화 ‘수상한 그녀’(황동혁 감독, (주)예인플러스 제작)와 꼭 맞다. 아주 수상할 정도로.
심은경은 ‘수상한 그녀’에서 오두리 역을 맡았다. 아들 자랑이 유일한 낙인 욕쟁이 칠순 할머니 오말순(나문희)은 청춘 사진관으로 들어갔다 나온 후 생글생글 20대 처녀가 된다. 그리고 오말순은 오두리로 살아가며 빛나는 전성기를 즐겨 보기로 마음을 먹는다. 오두리는 딱 심은경이었다. 나이도, 비주얼도 어쩜 그렇게 잘 어울릴 수가 있으랴. 찰진 사투리와 정체불명의 욕을 무자비로 쏟아내는 심은경. ‘수상한 그녀’는 심은경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생소한 캐릭터, 가능한걸까 걱정 많아”
또래 배우들과 나란히 했을 때 심은경에게는 뭔가 다른 매력이 있다. 쉽게 가려고 만들어 놓은 길은 잘 가지 않는다. 그저 자신에게 맞는 길을 만들어 걸어갈 뿐. “잘 자랐다”고 건네니 “잘 자란 거 맞다. 잘 먹고 아주 잘 자라고 있다”며 받아친다. 눈을 반짝이는 그 모습까지 사랑스럽다. 그래, 사랑스럽다는 그 단어가 딱 좋다. 그래서 ‘수상한 그녀’는 더욱 궁금하다. 어떤 선택의 기로에서 작품을 선택했는지, 도대체 왜 선택했는지. 하지만 심은경에게도 고민은 많았다. 캐릭터가 캐릭터다보니 당연히 부담됐을 수 밖에.
“기존의 한국영화에서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캐릭터라 그 자체만으로도 생소했어요. 뭐, 캐릭터를 둘째 치더라도 할머니 연기를 해야 한다는 점 때문에 걱정이었죠. ‘이게 가능해?’ 싶더라고요. 저 뿐만 아니라 다른 여배우라도 이게 가능할까 싶었죠. 그래서 함부로 선택을 할 수는 없었어요. 아역배우라는 타이틀을 벗을 수 있는 기회의 장이기는 했지만 잘못했다가는 영화는 물론이거니와, 제 연기에 대한 혹평이 이어질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출연 고사도 했었는데, 다시 생각을 해본 거죠. 시나리오를 두 번째 읽을 때였는데, 성동일 선배님과의 병원 신에서 펑펑 울었어요. 이 장면 하나를 위해서라도 ‘수상한 그녀’를 찍어야겠다 싶었죠.”
심은경이 짊어져야 될 짐은 꽤 컸다. 심은경이 영화 전반을 이끌어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심은경은 도전했다. 한국적인 설정에, 지금까지 없었던 여성 캐릭터에 반했다. 새롭게 시도될만한 의미가 있겠다 싶었다. 그렇게 선택한 ‘수상한 그녀’를 통해 심은경은 많은 것을 알게됐다. 그 중에서도 심은경은 가족의 의미에 대해 자연스럽게 끌렸다. “인생에 있어서, 그리고 배우로서 배워야 할 점들이 많은 작품이다”라고 정의하는 그 모습이 어찌 대견스럽다. 20살의 인생 이야기도 제법 흥미롭다.
“이번 작품을 통해 부모님을 되돌아보게 됐어요. 참 애틋한 게 많거든요. 어머니께서 뒷바라지를 많이 해주셨죠. 저만 생각하는 게 늘 미안해요. 완성된 버전을 보며 ‘이건 어머니를 위한 영화, 어머니에게 바치는 영화’라는 느낌이 딱 들었죠. 한동안 연기를 제대로 보여준 적이 없었는데 ‘수상한 그녀’를 통해 또 다른 모습을 보여드렸다는 뿌듯함이 들었어요. 가능하지 않을 것 같은, 해내지 못할 것 같은 작품을 만들어냈다는 뿌듯함도 있고. 이제 절 아역 배우가 아닌, 성인 배우로 봐주시지 않을까요? 저 그동안 많이 자랐어요. 하하.”
◆ “연기 포기해야 될까 생각했던 시절도...”
심은경은 연기를 할 때 가장 행복하단다. 그래서 꼬부랑 할머니가 될 때까지 연기를 하고 싶단다. 미국에서 유학을 하는 3년을 어떻게 참았을까 싶었다. 심은경에게 3년은 조금 특별했다. 그렇게 하고 싶은 연기를 못하고 살았던 만큼 어둠의 시간도 조금은 있었다. 미국에서 사춘기를 겪고 방황을 하고 집중을 못하는 상황이 오면서 혼란에 빠졌다. 무대 위에서는 날아다니던 심은경도 평소에는 그저 평범한 소녀였기에. 그래서 자신감 없이 살기도 했었다. 힘들었다. 그 때 만난 게 바로 오두리다. 오두리로 인해 심은경은 그렇게 살아났다.
“부정적인 생각도 많이 하고 연기를 포기해야 되나 싶기도 했었어요. 유학 생활을 하다 보니 연기를 하던 내 자신을 망각하게 되더라고요.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싶기도 했었죠. 그 때 만난 게 ‘수상한 그녀’에요. 어머니가 그러시더라고요. 행복해지려면 이걸 해야 된다고. (웃음) 지금 돌이켜보면 그 때의 그 시련이 지금의 저를 만든 거 같기도 해요. 매사에 감사하게 되고, 정말 열심히 일하게 되더라고요. 그 당시에는 힘들었지만, 지금은 또 이렇게 좋은 결과가 있으니까 좋아요.”
그래서 ‘수상한 그녀’는 심은경에게 더욱 특별하다. 새로움이 필요한 시점, 성인 연기자로서 발돋움해야 될 그 시점에 만났기에. 연기 경력 10년, 웬만한 배우 뺨치는 경력의 소유자 심은경은 다시 출발 선상에 섰다. “10년이라고는 하지만 연기를 하는 것에 대한 자부심은 없다. 언제까지 아역 배우로 남을 수는 없는 것 아니냐. 그러니 난 다시 처음이다. 연기 경력이 지금의 나를 있게 해준 계기는 되겠지만 자랑할 건 아니다”라고 말하는 그녀. 자신은 턱없이 부족한 배우일 뿐이란다.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살아왔을 심은경. 잘 자란 그 모습에 마음속으로 박수를 보냈다.
“물론, 하고 싶은 건 많아요. 그런데 프로라는 이야기를 들으려면 일정 부분을 포기해야 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다 누리고 살 수는 없잖아요. 배우로 활동하면서 이외의 것들을 다 하면서 살려고 한다면 연기를 왜 해요. 안해야지. (웃음) 그런 의미를 생각하면 함부로 뭘 못하겠더라고요. 가끔 ‘이런 연기는 어떻게 해요’라고 물으시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솔직히 드릴 말씀이 없어요. 저는 연기를 하는 자체가 행복이거든요. 그냥 그게 여기까지 오게 만든 원동력이에요. 앞으로 갈 길이 많아요. 그걸 생각하면 벌써부터 설레요.”
자신의 길을 꿋꿋하게 찾아 걸어가는 심은경. 그것 하나만으로도 그녀의 인생은 절반 이상의 성공이다. 20살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누가 그랬나. 이렇게 모든 것을 꿰뚫어보고 있는데. 그녀의 30살, 40살이 기대된다. 더불어 연기 인생 20년, 그리고 그 이상까지.
한국경제TV 최민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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