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충현의 ‘펀드노트’] 22편. 펀드슈퍼마켓에 거는 기대
“대화까지는 칠 십리의 밤길, 고개를 둘이나 넘고 개울을 하나 건너고, 벌판과 산길을 걸어야한다.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있다. 밤길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 포기와 옥수수 잎 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붓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가산(可山)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가산은 이 소설에서 허 생원과 젊은 장돌뱅이 동이를 통해 보부상의 애환을 잔잔하게 소개했다. 그래서 일까 우리의 기억 속에 보부상, 장돌뱅이, 방물장수는 단순한 장사꾼이 아니라, 먼 곳의 얘기를 전해주는 메신저이고 만물상이다.
오늘날 만물상은 슈퍼마켓이 되었다. 슈퍼마켓의 사전적 의미는 셀프서비스 방식을 도입하여 인건비를 절감하고, 유통경비를 줄여 싼 가격에 상품을 파는 소매점이다. 이런 현대적 의미의 슈퍼마켓의 시작은 작고 소박했다. 원예저술가인 ‘빌로스(Bill Laws)’의 저서 “예술가의 채소밭”에 따르면 1869년 ‘존 세인스 버리’와 그의 아내가 영국 ‘코번트 가든’ 시장으로 가는 길목(드루리 골목길)에 작은 상점하나를 낸 것이 슈퍼마켓의 시초라고 한다.
초기 슈퍼마켓은 취급하는 물품이 단순했다. 주로 식료품이 중심이었다. 그러다 차차 손님이 늘고 원하는 물건이 다양해지면서 오늘날과 같은 만물상 초대형상점으로 발전했다. 내년 초 영업개시를 목표로 국내에서도 펀드를 슈퍼마켓에서 팔게 되었다. 물론 우리에게 익숙한 일반적인 슈퍼마켓에서 파는 것은 아니고, 온라인상에 플랫폼(platform)을 구축하고 그 안에서 펀드를 파는 것이다.
펀드슈퍼마켓은 다양한 판매채널을 통해 판매처 간 공정 경쟁을 유도하고, 낡고 고질적인 판매 관행('계열회사 펀드 밀어주기' ‘불완전 판매’ 등)에 제동을 걸어 공급자 중심에서 수요자 중심으로 펀드시장 개편을 기대 할 수 있는 제도다. 하지만 이와 같은 기대와 달리 우려의 목소리도 크다. 우선 지속되고 있는 펀드시장의 침체와 성공적인 조기 정착에 필수요건이라 할 수 있는 실명인증 및 IFA(독립자산관리사) 제도 등이 영업개시 전까지 깔끔하게 마무리 될 수 있을지 불안감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펀드슈퍼마켓이 내세우는 익숙한 장점(낮은 비용과 편리한 구매)만 가지고는 성공을 장담할 수 없다. 펀드는 누가 어떻게 팔던 투자 상품이기 때문에 수익률 향상이 뒷받침 되어야한다. 여타의 장점은 보조적인 것이다. 따라서 출범하게 될 펀드슈퍼마켓도 최우선 과제를 투자자들의 수익률 향상에 두어야 한다.
당분간 펀드슈퍼마켓에 높은 관심을 가질 세대는 컴퓨터에 익숙한 20~30대가 될 것이다. 이들 세대의 투자 특징은 직관적이고 세밀하며 합리적이다. 따라서 펀드슈퍼마켓이 영업초기 과도한 매출 욕심을 부려 어설픈 꼼수를 부리거나, 겉과 속이 다른 억지 영업을 했다가는 금방 들통 나고 말 것이다. ‘펀드슈퍼마켓 발(發) 불완전판매’가 생기면 그나마 남은 펀드시장의 신뢰마저 물거품이 될 것이다.
펀드슈퍼마켓은 규모는 작지만 잘만 운영되면 불합리한 펀드 판매시장의 구도를 바꿀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다. 정부가 이 제도를 발 벗고 추진하고 있는 것도 이와 같은 펀드슈퍼마켓의 잠재력을 활용하기 위함일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도입하는 제도인 만큼, 영업개시 전에 예상가능한 문제점을 철저히 찾아내 사전에 대비책을 마련해야 놓는 것이 필요하다. 금융 산업은 신뢰가 생명이다. 아무쪼록 의욕적으로 시작하는 펀드슈퍼마켓 제도가 펀드시장 내 불신을 걷어내고, 침체된 펀드시장에 활력소가 되어 주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