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겨울, 서울 홍대 앞 만화 가게에서 발견한 프랑스 만화 ‘설국열차’를 보고 기차라는 공간에 매료돼 영화화를 결심했던 봉준호 감독. 우리나라에서 9개월, 체코에서 4개월 총 1년 3개월의 프리 프러덕션(pre production) 기간을 거친 후 바란 도프 스튜디오에서 2개월 4주간의 촬영된 ‘설국열차’(봉준호 감독, 모호필름 오피스픽쳐스 제작)는 그 후 약 1년간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만날 수 있게 됐다. 최고의 수식어가 따라 붙었던 작품, 관객들이 그토록 기다린 ‘설국열차’가 베일을 벗었다.
기상 이변으로 모든 것이 꽁꽁 얼어붙은 지구,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 기차에 올라탔다. 이 기차는 선택된 사람들이 술과 마약을 즐기는 앞쪽 칸 부터 빈민굴 같은 꼬리 칸 까지 나누어져 있다. 기차가 달리기 시작한 17년 째, 꼬리 칸의 지도자 커티스(크리스 에반스)는 긴 세월 준비해온 폭동을 일으키고 기차 전체를 해방시키기 위해 전력으로 질주한다.
기차라는 독특한 공간과 그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쇳덩어리들과 최후의 생존자들을 태운 노아의 방주에서 조차 칸과 칸으로 계급이 나뉘어 진 채 살아가는 인간들. 극단적인 상황에 처한 인간의 본성을 파헤치고 싶었던 봉준호는 원작 만화의 독창적인 발상에서 출발, 새롭고 격렬한 작품을 탄생시키기 위해 새로운 스토리와 인물들을 재창조해냈다. 봉준호+디테일(detail). 일명 봉테일이라고 불리는 봉준호의 세심함이 단단히 한 몫 했다.
봉준호는 “봉테일이라는 별칭을 들을 때 마다 괴롭다. 싫은 건 아니지만 스태프들이 웃을까 걱정이 된다. 누구보다 허술하고 구멍 난 연출가다. 이 모든 것은 스태프들이 다 보완해준다”며 겸손함을 잃지 않았다. “좁고 긴 공간에서의 싸움은 만원 지하철을 타는 우리의 모습과도 같아요. 화려한 무술 동작이 아닌 몸과 몸이 부딪히는 모습을 만들고 싶었죠. 육체적이고 사실적인 싸움 말이에요. 정말 저런 곳에서 싸우면 그렇게 되겠구나 싶은 마음 있잖아요. 왜.”
남궁민수(송강호)가 굳이 영어를 사용하지 않고 한국어를 구사하며 커티스와 이야기를 할 때 통역기를 이용하는 것도, 지구에 남은 최후의 생존자들이 모두 우리나라 사람이 아닌 것도, 양복 실밥 하나에도 정성을 기울이고 눈을 크게 뜨지 않으면 찾지 못할 정도의 세심함도 봉테일이기에 가능했으리라. 이 모두 하나의 작품을 탄생시킬 때 꼭 필요한 섬세함 아니겠는가.
작품의 완성도에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은 다름 아닌 기차 세트다. 실감나는 기차의 느낌을 주기 위해 제작팀은 최고 100m의 길이를 가진 바란 도프 스튜디오에 둥지를 틀었다. 그리고 실감나는 기차의 느낌을 주기 위해 초대형 규모의 짐벌(Gimbal)을 설계하고 제작했다. “감독의 욕심은 끝이 없어요. 제작비가 400억 원이었지만 40억 원만 더 있었으면 싶었죠. 아마 그랬다면 영화가 더욱 풍성해지지 않았을까 싶어요. 우리나라에서는 역사상 최고 대작이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크리스 에반스는 인터뷰에서 중저예산 영화라고 말하더군요. 거긴 2000억 원대가 넘어가니 말이에요.”
크리스 에반스의 이야기를 하자니 배우들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다. 스튜디오만큼 화려한 것이 바로 배우들 아니겠나. 가장 먼저 캐스팅된 송강호(남궁민수) 고아성(요나)를 비롯해 크리스 에반스 에드 해리스(윌포드) 존 허트(길리엄) 틸다 스윈튼(메이슨) 제이미 벨(에드가) 옥타비아 스펜서(타냐) 이완 브렘너(앤드류)까지. 존재 자체만으로도 묵직한 안정을 주는 이들은 배우 보는 맛을 제대로 느끼게 해준다. 봉준호의 인복이 제대로 진가를 발휘하는 순간이다.
전 세계 167개국 판매를 완료한 ‘설국열차’. 10분 분량의 하이라이트 영상만으로 할리우드 메이저 배급사인 와인스타인 컴퍼니(Weinstein Company)가 북미 영국 뉴질랜드 호주 등의 영어권 국가의 배급 권을 확보한 데 이어 프랑스 일본 동유럽 남미 스칸디나비아 반도 중동 동아시아 지역 등 전 세계 거점 국가에 대부분 판매를 완료하는 쾌거를 거두었음에도 봉준호는 덤덤했다.
“수식어가 따라다녔던 것처럼 글로벌 대작을 찍고 싶었던 것은 아니에요. 인류의 보편적 주제잖아요. 힘이 있는 자와 없는 자, 인간의 드라마에요. 어떻게 보면 한국적인 정서도 녹아있고요. 아주 단순하게 생각을 했어요. 국내 흥행?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잘 되길 바랄 뿐이죠. 영화 ‘플란다스의 개’에서 부터 ‘괴물’에 이르기까지 비교 체험 극과 극을 해봤기 때문에 아마 그 사이 어딘가가 되지 않을까 싶네요. 하하.”
★재미로 보는 기자 생각
커티스가 기차의 제일 앞 칸으로 가기 위해 17년을 갈고 닦아 그 결과물을 내놓는 순간, 아마 숨이 뻥 뚫릴 것. 짧지 않은 125분은 그리 길지 않으리. 암 덩어리가 빠져나간 것 같다고 다소 유머러스하게 말한 봉준호의 고심이 느껴지는 순간. 꼬리 칸에서 제일 앞 칸까지 당신이 상상한 기차 칸은? 우리의 삶을 다소 묵직하고 묵직하게, 그러나 한국 영화의 새로운 장은 확실.
한국경제TV 최민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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