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적완화 조기 종료, 채권 버블 붕괴, 비이성적 과열 등 최근 월가와 미국 학계를 중심으로 달아오르는 주요 논쟁들이다. 이 중에서 가장 뜨거운 것은 미국 증시 앞날과 관련해 월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비이성적 과열(irrational exuberance) 논쟁’이다.
‘비이성적 과열’이란 1996년 들어 주가가 거침없이 오를 때 당시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이었던 앨런 그린스펀이 처음 사용했던 용어다. 이 발언 직후 미국 주가는 20% 폭락했다. 워낙 투자손실 규모가 커 ‘마진 콜(margin call·증거금 부족)’에 시달렸던 미국 금융사들이 투자자산을 회수하는 과정에서 아시아 외환위기를 낳게 한 단초를 제공했다.
현재 미국 증시는 1996년 상황과 유사하다. 이달 들어서도 하루 간격으로 사상최고치 행진이 이어가고 있지만 지난달에는 다우존스지수가 1996년 11월 이후 무려 17년 만에 10일 연속 사상최고치를 기록했다. 다우지수에 이어 S&P500지수도 2007년 10월 이후 66개월 만에 사상최고치를 경신했다.
세계적인 투자은행(IB)와 대부분 월가의 시장참여자들은 주가 상승세가 경제여건에 비해 빠르다는 점을 인정한다. 올들어 지금까지 다우지수 상승폭은 무려 12%에 달하지만 하지만 성장률은 2%대로, 잠재수준₁을 밑돌 것으로 추정된다. 그만큼 양적완화로 풀린 돈의 힘에 의해 주가가 올라가는 유동성 장세의 성격이 여전히 강하다는 의미다.
이 때문에 마크 파버, 누니엘 루비니 교수 등 대표적인 비관론자들은 앞으로 미국 증시가 큰 혼란을 겪을 것이라는 발언을 연일 쏟아나고 있다. 특히 작년 8월 월가를 뜨겁게 달궜던 워런 버핏과의 ‘주식 숭배(cult of equity)’ 종료 논쟁에서 수세에 몰렸던 빌 그로스는 올해 안에 미국 주가가 20% 이상 폭락할 것이라는 극단적인 비관론을 내놓았다.
주식숭배 논쟁이 워낙 유명했던 만큼 그 내용을 살펴보면 빌 그로스는 주식 숭배는 끝났다고 단언하면서 채권에 투자할 것을 권했지만 워런 버핏은 주식을 사두는 것이 유망하다고 밝히면서 자신이 운영하는 버크세 해셔웨이의 주식보유 비중을 늘렸다. 그 이후 다우지수는 무려 2000포인트 이상 상승해 버핏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시장이 움직이고 있다.
이 논쟁이 뜨거워서 그런지 ‘비이성적 과열’ 용어를 처음 사용했던 그린스펀 전 의장도 현 주가 수준에 대해 입을 열었다.₂ ‘현재 통화정책 등 정책여건이 1996년 상황과 다르기 때문에 지금 주가 수준이 비이성적 과열이라고 보기는 힘들다’고 진단했다. 곧이어 밴 버냉키 현 의장도 종전의 통화정책 기조를 지속할 뜻을 재확인하면서 또 하나의 논쟁인 양적완화 조기 종료 가능성을 일축했다.
그린스펀 전 의장이 지적한 1996년 당시와 정책 여건이 달라진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통화정책 대상에 실물경제 여건 이외에 증시, 부동산 등 자산시장 포함 여부를 놓고 아직까지 미국 학계를 중심으로 뜨겁게 벌어지고 있는 그린스펀과 버냉키 전·현직 의장 간의 논쟁에 대한 사전지식이 필요하다.
먼저 증시 입장에서 중요한 통화정책 대상에는 원칙적으로 증시나 부동산과 같은 자산시장 여건을 포함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그린스펀 전 의장의 신념이다. ‘그린스펀 독트린’이라고도 불리워지는 이 정책은 2000년대 초반 실물경제 여건만을 고려한 저금리 정책은 한때는 큰 성공을 거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자산시장의 거품을 일으켜 2008년 하반기 이후 금융위기를 낳게 한 주범으로 꼽히면서 그린스펀의 명예가 크게 실추됐다.
이 때문에 현재 위기를 풀어가는 버냉키 FRB 의장은 통화정책 대상에 자산시장을 함께 고려해야 하고 실제로 추진하고 있다. 특히 고수익을 목적으로 각종 파생상품과 레버리지 투자로 실물경기와 자산가격이 따로 노는 정도가 심한 여건에서는 통화정책은 자산시장을 반드시 고려해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 ‘버냉키 독트린’의 핵심이다.
버냉키 의장은 자산가격 버블 방지를 위해서는 금리인상보다 금융규제와 감독 강화가 효과적이라는 종전의 입장을 고수하고 있으나 최근에는 변화 가능성을 시사한다. 금융위기 이후 지금까지 FRB의 통화정책 운용결과를 보면 부동산, 증시 등 자산시장을 감안해 ‘버냉키 독트린’ 시각에서 추진되고 있다.
하지만 금리 등 기존의 통화정책수단이 자산가격 변동을 제어하는 데 유효한가에 대한 논란이 있어 추가적으로 논의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플로서 필라델피아 연준 총재는 자산가격 버블을 막는 데 금리인상은 ‘매우 무딘 수단(a very blunt instrument)'이며 동시에 다른 자산가격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또 더들리 뉴욕 연준 총재는 현행 통화정책수단이 버블 대응에 부적합하다면 새로운 수단을 고안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아직도 ‘그린스펀 독트린’에 입각해 통화정책을 추진해야 한다는 주장₃이 있지만 버냉키 현 의장을 비롯한 대부분 학자들은 금리변경과 같은 중요한 통화정책을 추진할 때에는 자산가격을 고려해야 한다는 쪽으로 의견이 기울고 있는 추세다.
이 때문에 실물경기에서 실제 성장률이 잠재수준을 웃도는 ‘인플레 갭’이 발생하더라도 자산시장이 침체돼 있으면 금리인상은 신중을 기하고 있다. 현 연방준비제도이사회 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 중앙은행의 통화정책도 이 같은 맥락에서 추진하는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다.
또 인플레나 자산가격 상승에 대한 기대심리를 반드시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 특히 실물경기 회복이 질적으로 완전치 못한 상황에서 이런 기대심리를 선제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금리인상이라는 과격한 통화정책 수단을 들이댈 경우 실물경기는 다시 둔화되고 자산시장은 돌이킬 수 없는 침체국면으로 빠트릴 위험이 높기 때문이다.
이제 막 회복의 ‘싹이 돋는 단계(green shoots)’에서 성급한 기준금리 인상으로 한 나라 경제의 거름에 해당하는 돈을 거둬들일 겨우 노랗게 질려 ‘시든 잡초(yellow weeds)’로 죽이는 우(憂)를 범할 수 있다. 대표적인 예로 1930년대 세계경제가 대공황, 1980년대 미국경제가 스테그플레이션, 1990년대가 일본경제가 잃어버린 10년에 빠진 사례다.
두 독트린은 최근 ‘비이성적 과열’ 논쟁이 일고 있는 미국 증시를 진단하고 앞날을 예측하는데 아주 중요한 문제다. 현재 주가 수준이 높다는 것은 월가 참여자들이 인정하고 앞날을 우려한다. 만약 그린스펀이 아직까지 FRB 의장을 한다면 현재 주가를 ‘비이성적 과열’이라는 판단하고, 실물경제 여건에 맞추기 위해 통화정책 기조를 양적완화 조기 종료 등을 통해 출구전략을 추진할 것이라는 예상이 나올 수 있다. 물론 그때는 주가가 하락해 올해안에 미국 증시가 크게 흔들릴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지금은 버냉키가 의장이 맡고 있다. 그의 독트린대로 현 주가 수준을 판단해 본다면 현재 미국 주가가 ‘비이성적 과열’이라고 보기는 어렵고 실제로 그렇게 판단하고 있다. 설령 ‘비이성적 과열’이라 하더라도 전통적인 정책수단이 제한된 상황에서는 ‘부의 효과’를 통해 고용창출 등에 미흡한 실물경제 회복세를 끌어올리기 위해 현 통화정책 기조를 그대로 밀고 나갈 수밖에 없다.
갈수록 각국의 통화정책과 월가의 참여자들은 ‘그린스펀 독트린’보다 ‘버냉키 독트린’ 쪽으로 기울고 있다. 자존심이 강한 그린스펀도 현 주가 수준을 ‘비이성적 과열’이 아니라고 한 것으로 봐서는 ‘버냉키 독트린’을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올 2분기를 앞두고 골드만 삭스, 모건 스탠리 등 세계적인 투자은행(IB)들도 올해말 주가 목표치를 상향 조정하고 있다.
<글. 한상춘 <a href=http://sise.wownet.co.kr/search/main/main.asp?mseq=419&searchStr=039340 target=_blank>한국경제TV 해설위원 겸 한국경제신문 객원논설위원(sch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