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脈] 두 거인의 그림자가 주는 교훈

입력 2012-11-15 14:50
수정 2012-11-15 14:50
2006년 8월11일 오전, 기자는 경기도의 신한은행 연수원에서 라응찬 신한금융지주 회장을 만날 수 있었다. 장학생들에게 장학증서와 장학금을 전달하는 행사 자리였다.



다른 기자들을 제치고 한걸음에 달려간 탓에 라 회장을 혼자 만날 수 있는 행운(?)을 거머쥐었다.



"회장님, 어제 꿈자리는 좋으셨어요?" "........"



"LG카드 본 입찰 마감됐잖아요. 이길 것 같나요?" "아~ 그거....뭐 최선을 다했지. 김(승유)회장도 '형님. 승부를 가려봅시다' 하더라구...." 라 회장은 여기까지만 언급하고 입을 꾹 닫았다.







결과는 모두가 다 아는 것처럼 신한의 승리였다. 국내 1위 카드사를 둘러싼 신한과 하나의 싸움은 사실 라응찬과 김승유라는 금융계의 두 거인간의 싸움이었다. 라 회장은 LG카드 인수 성공으로 지금의 종합금융그룹의 면모를 갖추는데 성공했지만 김 회장은 지난해 천신만고 끝에 외환은행을 인수하기 이전까지 은행, 보험, 카드 M&A에서 번번히 쓴잔을 들이켰다. 2금융권에서 출발해 후발 은행 설립부터 거대 금융공룡으로 성장하기까지 두 사람은 앞뒤를 다투는 맞수였지만 LG카드 인수전을 계기로 무게의 추는 라 회장으로 기우는 모습이 역력했다.



하지만 사람 일을 누가 알겠는가? 2010년 터져 나온 '신한 사태'는 금융계의 최고참을 한 방에 쓰러뜨렸다. 14일 라 회장은 신한사태 관련 공판에서 검찰측 증인으로 채택됐지만 라 회장측은 재판부에 알츠하이머병에 걸려 치료중이라며 불출석 신고서를 제출하고 법정에 나타나지 않았다. 라 회장이 치매 증상이 있다는 말은 사실 올해 초부터 금융가에 나돌기 시작했지만 법정에서 공식적으로 확인되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추락이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아서 온 국민이 알게된 국민펀드(?) '론스타'로부터 외환은행을 거머쥔 김승유 회장은 9회말 역전 홈런을 치는듯 했지만 그 역시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대통령의 대학 동기로 널리 알려진 김 회장은 현역에서 은퇴했지만 하나고와 관련된 구설수에 올랐다. 직접 기자회견을 자청해 아무런 문제가 없다며 항변해 건재함을 과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상의 자리에 있을 때와 같은 울림은 아니었다. 야당은 집권할 경우 외환은행 M&A 과정을 다시 들여다 보겠다며 으름짱까지 놓고 있다. 위태로워 보인다.



이들을 금융계의 거인으로 만든 것은 97년 터진 'IMF 외환위기'였다. 직업이 'CEO'였던 두 사람은 M&A, 공격적인 확장, 2인자를 인정하지 않는 철저한 1인체제로 21세기 첫 10년 한국 금융계를 호령했다. 이들의 업적은 사실 '기적'에 가깝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금융의 대형화, 겸업화라는 시대의 요구에 맞춰 이들이 일궈낸 성과를 일일이 숫자로 확인할 필요도 없을 정도니까.



하지만 최근 금융권의 상황을 살펴보면 이들이 일생을 걸고 건설한 '금융제국'이 뿌리채 흔들리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작년 월가 점령시위로 시작된 금융권의 탐욕에 대한 비난과 압박은 거꾸로 이제 금융권을 자포자기상태로 만들지나 않을까 걱정해야할 지경까지 이르렀다. 외환위기 직후 비상이라는 이유로, 관행이라는 이유로, 주주가치 극대화라는 이름으로 이들이 주도한 금융의 변화는 이제 스스로의 덫에 빠진 듯하다. '금융백화점'이라는 아이디어를 끈질기게 밀어붙여 '씨티그룹'이라는 제국을 건설한 뒤 각종 스캔들로 무너진 샌디 웨일은 올해 미 의회 청문회에 나타나 금융백화점을 이제는 해체해야 한다고 발언해 월가를 충격에 빠트렸다.



'거인'의 추락을 보면서 이것이 개인의 불행에 머물지 않고 한국의 금융회사와 금융산업의 불행으로 확대되는 모습은 씁쓸함을 지울수 없게 한다. 업(業)에 대한 근본적인 자기성찰만이 이같은 위기를 극복하게 할 것이다. 지금도 거인의 그림자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하는 금융권이 현재에 안주하며 이 고비만 넘겨보자는 생각이라면 큰 착각이다.



한 해가 저물기 시작하면서 금융권 CEO들은 으례 그래왔듯이 불우이웃 성금을 내고, 김장을 담그고, 연탄을 나르느라 바쁜 모습이다. 소홀히 할 수 없는 중요한 일이지만 지금 금융권이 고민해야할 더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금융권 스스로 풀어내지 못한다면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한 변화가 시작될 것이다. 떠난 거인들이 금융권에 남긴 가장 중요한 교훈이 바로 이 점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