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전 세계 경제신문과 방송에는 연일 런던증시에 상장된 두 자원회사의 혈투가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있다.
두 회사 모두 스위스에 본사를 두고 있지만 싸움터는 런던이다. 글렌코어 인터내셔널(Glencore International plc)은 이미 35%의 지분을 가지고 있는 광산업체 엑스트라타(Xstrata)의 잔여 지분을 인수하겠다며 적대적 M&A를 추진하고 있다.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가 중재자로 나설 만큼 두 회사는 자원업계에서는 떠오르는 신성이다. 전 세계 자본시장의 방향을 바꿀만한 대형 이벤트가 이번 주에 몰려있지만 두 회사의 드라마 같은 경쟁은 세인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지구 반대편에 있는 한국의 투자자들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자원업계의 합종연횡
첫째는 두 회사의 M&A 규모가 올해 들어 최대 규모라는 점이다. 글렌코어는 엑스트라타 주식 1주당 자사 주식 3주를 교환하는 방식을 최종적으로 제안했다. 앞서 제안은 엑스트라타 이사회에서 거부당했다. 총 규모는 350억달러(원화 약 40조원)에 달한다. 세계적인 불황에서 이 정도 M&A는 시장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다른 현실이 숨어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하기 이전까지 자원개발, 매매, 유통업체는 전례없는 호황을 누렸다. 투자자들에게도 잊혀진지 오래된 업종이었지만 2000년대 들어 브릭스(BRICs)의 부상으로 자원은 공급우위에서 수요우위로 바뀌었다. 각종 실물상품의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관련 기업의 주가의 고공행진도 이어졌다. 하지만 미국에서 발생한 빚잔치는 곧바로 대서양을 건넜다. 유로화라는 단일 통화로 자산효과에 취해있던 유럽도 된서리를 맞았다. 급기야 미국은 급한 불을 껐지만 세계 경제의 기관차라는 주도권을 일부 상실했지만 구조적 모순으로 가득차있던 유럽은 뿌리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채 시간이 지연되면서 금융,재정위기는 실물경제의 위기로 전이됐다. 대선을 앞둔 미국도 지도부 교체를 앞둔 중국도 17개의 이해관계를 가진 유로존도 속시원한 답을 내놓지 못했다.
실물경제의 위기는 골드만삭스의 짐 오닐의 획기적인 발명품들에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블랙홀처럼 전 세계 자원을 빨아들이던 신흥국가들도 주춤하기 시작했다. 호황을 누리던 자원업계는 급브레이크를 밟았지만 그동안 이어진 '관성의 법칙'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과도한 투자와 확장은 하루 아침에 멈출 수 없었던 것이다. 아래 표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상품가격은 여전히 2008년 이전 수준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자료 : 톰슨-로이터)
자원업계는 비용절감이 절실한 상황이다. 각종 투자계획을 취소하고 인력감축과 자산매각에 열을 올리고 있다. 호주를 비롯한 자원부국도 갑자기 호황이 끝나면서 높아지는 실업률과 경기둔화를 막기 위해 최근까지 공격적인 금리인하를 단행할 수 밖에 없었다. 글렌코어와 엑스트라타는 합종연횡(Consolidation)을 통해 이같은 숙제를 한꺼번에 해결하려는 움직임으로 봐야 한다. 자원업계의 군살빼기가 본격적화된 것이다.
결국 상품가격은 되살아난다
두번째는 보다 미시적인 동시에 중장기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글렌코어는 상품매매의 귀재인 마크 리치가 설립한 '마크 리치'라는 회사를 모태로 한다. 시장에 상장된 상품 뿐만아니라 아직 발굴되지도 않은 상품까지 매매를 했던 천재적인 트레이더는 하지만 이란 팔레비 왕조가 혁명으로 무너진 이후에도 이란과 원유거래를 하다 그동안의 명성을 한꺼번에 날렸다. 비록 빌 클린턴 대통령의 취임과 함께 사면을 받았지만 회사는 리치의 부하였던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의 회계사인 이반 글라센버그에게 넘어갔다.
글라센버그는 MBO(Management Buy-out)를 통해 회사를 장악한 뒤 시장의 예상을 깨고 2011년 회사를 런던 증시에 상장해 막대한 부를 거머쥐었다. 글라센버그는 전설적인 금융가문인 로스차일드 남작4세의 외아들 Nat Rothschild에게 상장 직전 4,000만달러의 전환주를 발행해 주요투자자로 끌어들였다. 로스차일드(영국으로 간 네이선 로스차일드의 후손)는 다이아몬드의 대명사 드 비어스, 세계적인 광산업체인 B.H.빌리튼 등 자원분야에 남다른 애착을 보여준 가문이다. Nat Rothchild는 영국을 떠나 스위스에 터전을 잡고 지금도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의 광산과 자원을 끊임없이 사들이고 있다('007 퀀텀 오브 솔러스'에서 볼리비아의 물자원을 독점하려는 퀀텀이라는 조직의 야망은 그냥 영화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닌듯 하다). 엑스트라타도 스페인과 남아공을 기반으로 출발한 소규모 광산업체였지만 상품가격 급등을 발판으로 지난 2002년 상장에 성공해 승승장구해왔다. 글렌코어 이외에 카타르 국부펀드 등 전 세계 큰 손들을 지원을 받고 있다. 하지만 진행중인 M&A의 배경에는 부진한 주가가 자리잡고 있다.
두 회사의 주가를 살펴보면 M&A의 이유가 쉽게 이해된다.
<글렌코어 주가 동향>
<엑스트라타 주가 동향>
두 회사의 주가는 이제 막 바닥을 탈출하려는 순간이거나 바닥을 다지고 있다. 기존 주주들의 입장에서는(특히 글렌코어의 대주주인 회사경영진과 로스차일드에게는) 더 없는 기회인 셈이다. 또 합병으로 얻은 이득 뿐만아니라 합종연횡을 거친 초대형 자원업체는 경기만 호전되면 이익을 독식할 가능성도 높아진다. 일련의 모든 과정은 단 하나의 전제에서 출발한다. "경기만 좋아지만 자원(상품)가격은 다시 올라갈 것이다"라는 가정이 없다면 2012년 최대 규모의 M&A, 그것도 적대적 M&A는 진행되지 않았을 것이다.
모두가 유럽의 재정위기, 미국 Fed의 양적완화, 애플의 아이폰 출시 처럼 눈에 띄는 현상에만 주목하고 있을 때 과감하게 진행되는 자원업계의 움직임에도 관심을 기울여야할 것 같다. 다음 사이클을 바라보는 이들의 혜안을 빌려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