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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일본강점기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서울과 홍콩에서 중학교를 다녔고, 한국전쟁 직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근교에 위치한 가마쿠라에 있는 고등학교 졸업 후, 동경대 인문학부에 입학했다.
어린 시절 일본 선불교의 본산이기도 한 가마쿠라에서 살았던 경험은 예술가로서의 삶의 이력에 정신적인 기반이 됐다. 대학에서 미학을 선택한 그는 유럽 철학과 현대 음악을 배웠다.
1958년 독일에서 존 케이지와의 우연한 만남은 선불교, 신음악에 대한 관심을 전위 미술로 확장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1950년대 말 슈톡하우젠, 보이스 등과 만나 독일에서 펼쳐진 백남준의 퍼포먼스는 피아노를 부수고 존 케이지의 넥타이를 자르는 등 충격적이었다. 기존 부르주아 문화에 대한 저항과 공격을 담은 퍼포먼스들은 곧이어 같은 생각을 지닌 조지 마키우나스 등과 같은 플럭서스 멤버들과의 공연으로 이어진다.
1963년 엥겔스의 고향으로 알려진 독일 북부 도시 부퍼탈의 파르나스 화랑에서 잘라진 소머리와 함께 미술의 역사상 처음으로 조작된 텔레비전 13대를 사용했다. 동경으로 돌아온 백남준은 일본의 엔지니어 슈야 아베의 도움을 통해 TV 모니터를 조각이나 회화의 조형 수단이 아니라 그 내부의 구조적 원리를 이용하여 주사선을 변형 시키는 작업을 발전시켰다.
1964년 미국으로 이주한 백남준은 첼리스트 샬럿 무어먼을 통해 유럽에서 실현하지 못했던 퍼포먼스들을 실현시켜 나가던 중 오페라 섹스트로닉 공연에서 음란죄로 체포되면서 문화 테러리스트로 악명을 떨치기도 했다.
백남준은 영상 이미지의 독특한 사용에서 테크놀로지와 인간 정신의 새로운 충돌을 보여줬다. 즉 의 禪, 참여TV의 놀이 정신, 그리고 스키타이왕 단군의 샤머니즘 등등. 이는 기계 문명의 미래를 탐문하는 백남준의 문명사적 시각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현대적인 아티스트로서 세계에 대한 개방적 태도를 보인 그는 2006년 지병으로 세상을 떴다.(참고:백남준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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