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치 못한 대지진과 원전 사태가 발생한지 1개월이 지난 지금, 국제금융시장이 일본경제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주목하고 있다.
2008년 9월 리먼 사태로 일본경제가 큰 영향을 받긴 했지만, 일본 정부가 실시한 각종 경기부양책으로 2009년 1분기에 경기바닥을 확인한 후 회복세가 지속돼 왔다. 그러나 2010년 들어 일본 정부가 마련한 부양대책 효과가 줄어들고 유럽재정위기에 대한 우려가 확산되자, 엔화가 강세를 보이면서 수출에 의존하던 일본경기가 둔화되기 시작했다. 특히 2010년 4분기 경제성장률은 전기대비 -0.3%를 기록해 5분기만에 마이너스 국면으로 추락했다.
■ 일본경제, 2010년 4분기 이후 다시 마이너스 국면으로 빠져 이미 난기류
총수요 항목별로 GDP 기여도를 보면 2010년 4분기 이후 모든 부문이 악화되고 있다. 이때부터 경기부양대책이 종료 혹은 축소되기 시작하면서 일본 국민들의 소비가 부양대책의 반작용으로 감소세로 돌아섰다. 설비투자는 일본 기업들의 채무부담이 줄어들고 자금 잉여액이 증가해 설비투자 여력은 크지만 투자심리는 여전히 불안한 상황이다.
더 큰 문제는 경기가 재둔화됐을 뿐만 아니라 물가가 지속적으로 하락해 디플레이션 국면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소비자물가지수 기준변경으로 일본 경제가 디플레이션 상태에서 벗어나는 시기는 더욱 늦춰질 것으로 예상된다. 5년마다 실시되는 소비자물가지수 기준변경이 오는 8월부터 적용될 예정이며, 이 조치의 영향으로 종전 기준에 비해 소비자물가상승률을 0.4%P 하락시킬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최악의 경우 일본의 소비자물가상승률은 2012년에도 마이너스권에서 머물 가능성이 높다.
설상가상으로 1990년대 이후 장기간 경기침체와 디플레 국면 지속으로 일본 경제의 국제위상은 계속해서 추락하고 있다. 좀처럼 내주지 않을 것으로 예상됐던 외환보유액은 이제 중국의 절반수준으로 급감했다. 이 때문에 대미국 국채투자 위상도 중국에 이어 2위로 전락했다. 수출과 GDP 규모도 각각 중국에 이어 3위로 추락했다. 올들어 S&P사로부터 9년 만에 강등당한 국가신용등급은 1인당 소득이 10분의 1에 불과한 중국과 같은 수준으로 떨어졌다.
2차 대전 이후 일본 경제의 주춧돌 역할을 해 온 제조업체들도 전반적인 경쟁력 약화로 후발국가에게 그 위상을 넘겨주고 있다. 특히 자동차와 더불어 일본 제조업의 양축이라고 할 수 있는 전기ㆍ전자산업의 세계시장 점유율이 떨어지고 있어 문제다. 기술적 우위를 바탕으로 일본이 독과점을 유지해오던 제품들의 세계시장 규모가 커지면서 후발주자인 한국, 대만, 중국 등의 시장점유율이 일본을 능가하고 있다.
■ 일본은 ‘5대 함정’에 빠져 정부 정책에 국민들이 반응하지 않는 ‘좀비 경제’
현재 간 나오토 정부가 총체적 난국에 빠진 경제를 회복시키고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으나 추가적인 재정확대는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 2010년 12월 약 5조엔의 추경예산안 편성했다. 특히 엔화 강세에 따른 일본 기업의 해외진출을 억제하고, 경기부양 목적으로 12년 만에 법인세율을 과감하게 인하키로 결정했으나 아직까지 큰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일본 정부의 자체평가다.
이 때문에 간 나오토 정부 출범 이후 한동안 소강국면에 머물렀던 소비세 인상논의가 올 한해 내내 거세질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 일본은 과다한 복지지출과 장기 경기침체로 재정적자를 쉽게 줄일 수 없는 상황이다. 간 나오토 정부는 경기부양과 재정적자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방안으로 증세를 통한 제3의 길을 모색해 왔다.
현재 간 나오토 정부는 경기부양을 위해 노력하고 있으나 ''5대 함정''에 빠져 그 효과는 의문시된다. 5대 함정이란 정부의 의도대로 경제주체들이 반응하지 않아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 ''정책함정(policy trap)''이다. 그 중에서 주가와 경기침체의 회복방안으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금리인하 정책은 ''유동성 함정(liquidity trap)''에 빠져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가장 큰 이유는 경제주체들이 과도한 부채에 시달려 소비나 투자를 하지 못하는 ''빚의 함정(debt trap)''에 걸려 있기 때문이다. 또 경제구조를 개혁하는 문제는 구호만 반복적으로 외치는 ''구조조정 함정(structure trap)''에 빠져 있는 점도 공통적이다. 이 상황에 놓이면 경제주체들이 미래에 대해 느끼는 불확실성은 증대돼 예측기관들은 전망이 또 다른 전망을 불러일으키는 ''불확실성 함정(uncertainty trap)''에 빠지게 된다.
실제로 일본은 1990년대 버블 붕괴과정에서 20년 이상 지속된 경기침체를 극복하기 위해 추진했던 모든 정책이 무력화 단계에 처해 ''좀비 경제(zombie economy)''라 부른다. 1990년 이후 무려 20차례가 넘는 경기부양정책은 국가채무가 국민소득(GDP)의 200%에 달할 정도로 재정수지만 악화시켰다.
기준금리도 ''제로'' 수준까지 인하했으나 경기회복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않고 있다. 각종 미명하에 구조조정 정책을 20년 넘게 외쳐 왔으나 경제구조를 개선하는 데에는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함에 따라 정책과 국민들의 불신 간 악순환만 반복되고 있을 따름이다. 이 때문에 대내외 전망기관들이 1990년대에 전망치를 가장 많이 수정한 국가가 일본이다.
국제통화기금을 비롯한 주요 예측기관들은 일본의 성장률이 지난해 4% 내외에서 올해는 1.5% 내외로 크게 둔화될 것으로 예상했다. 올 1월에 발표된 세계은행의 일본경제 성장률은 지난해 4.3%에서 올해는 1%대로 하향 조정했다. 이번 대지진 피해로 약 1% 포인트 이상 성장률을 낮출 경우 마이너스 성장률도 예상된다.
■ 향후 일본경제관련 국제금융시장에서 이슈가 될 변수에 주목할 필요
가장 주목되는 변수는 ''일본판 재정위기''가 표면화될 가능성이 높은 점이다. 지난해 GDP에 대비한 국가채무 비율은 200%에 달해 세계 최고수준이고 재정수지 적자도 GDP의 10%에 육박하는 수준이다. 단기적으로 대지진 사태 복구를 위한 재정수요와 향후 인구감소 등을 감안할 때 일본의 재정상태는 더욱 취약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재정적자와 국가채무가 개선될 가능성이 적다면 올해 안에 일본의 국가신용등급이 추가적으로 하락할 가능성이 높다. 재정적자로 인한 국가신용등급이 추가적으로 하락할 경우 일본경제의 국가부도(default) 우려가 본격적으로 제기될 수 있다. 하지만 일본 국채의 95%를 일본 국민들이 소유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일본 국민들이 부도시 겪게 될 ''낙인효과''보다 ''최종대부자(last resort)'' 역할을 할 것으로 보여 최악의 상황이 닥치더라도 국가부도에는 몰리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재정적자와 함께 일본경제가 당면한 또 하나의 과제는 디플레 국면을 언제 탈피할 것인지도 예의주시해야 한다. 일본의 실질GDP 성장률은 1980년대 평균 4.7%에서 1990년대 이후 1.2%로 급락한 것은 내수부진에 주로 기인한 점을 감안하면 디플레도 이 요인이 큰 것으로 지적됐다.
수출의 성장기여도는 1970년대 이후 0.5∼0.8% 포인트 수준을 꾸준히 유지하고 있는 데 비해 내수기여도는 70년대 3.8% 포인트, 80년대 4.0% 포인트에서 1991∼2008년에는 0.6% 포인트로 급락했다. 이 때문에 GDP에서 내수가 차지하는 비중은 1990년에 89.6%에서 2008년에는 82.5%로 크게 떨어져 경기침체, 디플레 등 구조적인 문제를 발생시키고 있다.
그런 만큼 당분간 일본 경제는 내수부문의 활력을 되찾아 디플레 국면에서 탈피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내수부진이 고용과 임금 불안정성 증대, 인구고령화 진전 등 당장 해결하기 어려운 구조적인 요인들에 주로 기인하기 때문이다. 정부의 재정여건도 크게 악화돼 1990년대처럼 정부가 민간수요를 적극적으로 대체해 촉진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내수가 쉽게 회복되지 않는다면 향후 일본 경제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게 위해서는 경제여건 이상으로 강세를 보이는 엔화 가치가 약세로 돌아서야 가능하다. 앞으로 엔화가 약세로 돌아서기 위해서는 간 나오토 정부가 인위적인 시장개입을 통해 엔화 약세로 돌려나야 할 의지가 가장 중요하다. 대외적으로는 유럽재정위기와 미국의 인위적인 달러약세 정책이 언제 마무리될 것인가가 엔화 약세전환 시기에 변수가 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현 간 나오토 정부의 정책방향과 과거 일본의 외환시장 개입사례를 감안하면 일본 경제가 어려움을 겪는다 하더라도 디플레 타개책으로 강도있는 외환시장 개입에는 소극적인 입장을 보일 것으로 예상된다. 주요 예측기관들은 앞으로 엔·달러 환율이 완만한 상승할 것으로 보고 있으나 일본경제 회복에는 크게 도움되지 못할 것으로 보고 있다.
예측기관들의 시각대로 엔화가 완만하게 약세를 보이는 것이 엔고에 따른 수출 부담을 덜어내고 내수확대에 큰 부담이 되지 않기 때문에 간 나오토 정부도 바라는 사항이다. 역사적으로도 일본 정부가 외환시장에 개입할 경우 의도했던 정책목적을 달성하기보다는 미국과의 통상마찰 등 부작용이 더 많이 발생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 간 나오토 정부, 올 하반기 이후 조기 하야될 가능성 높아
앞으로 국가채무와 디플레 국면, 엔화 강세 등이 쉽게 개선되지 않을 경우, 올해 안에 일본의 국가신용등급은 추가적으로 하락할 가능성이 높다. 이번 위기를 거치면서 국제신용평가사들은 개편된 국가신용등급에서 재정의 건전성에 대한 가중치를 높게 설정하는 방향으로 개편했다. 향후 국가신용등급이 추가적으로 하락하거나 나머지 평가사들이 신용등급을 하향 조정할 경우 일본은 난기류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벌써부터 일본 국민들로부터 지지도가 크게 떨어지고 있는 간 나오토 총리의 조기 퇴진문제가 거론되고 있다. 올 3월에 교토통신이 조사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19.9%로 한 달전에 비해 무려 12.3% 포인트나 급락했다. 일본 국민들의 지지도가 20% 밑으로 떨어질 경우 과거 일본 총리는 조기 하야해야 한다. 이 때문에 올 하반기 이후 중의원 해산과 새로운 총리선출 문제가 급부상할 것으로 시각도 만만치 않게 제기되는 상황이다.
앞으로 일본경제는 상당한 어려움이 예상된다. 우리 정책당국자와 국내 기업들은 선제적으로 대처해 나갈 필요가 있다. 특히 경제여건과 관계없이 강세를 보여온 엔화 가치가 급격히 약세로 전환될 경우 상당한 혼란이 예상된다. 한편으로 엔화 약세에 대비하면서 환율변동폭이 커질 가능성이 높은 만큼 환위험 관리에도 만전을 기할 필요가 있는 시점이다.
<글. 한상춘 한국경제TV 해설위원 겸 한국경제신문 객원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