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입력 2010-06-08 19:10
유학 생활에 점차 익숙해질 무렵 나 자신과 인생에 대해 돌아보기 시작하면서부터 일종의 강박관념에 사로잡혔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심했다 싶지만 당시엔 나름 꽤 심각하고 진지했다.



대학시절 척추 디스크 때문에 책상에 오래 앉아 있지 못했던 이유로 그 시절 잃어버린 시간을 만회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박관념처럼 머리에 박혀 있었나보다.

소위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문구가 내 생활의 화두였다.

삶에 여유가 조금씩 생기기 시작하자 이 생각이 다시 꼬리를 들었고, 첫번째로 생각한 실천방안이 MBA와 로스쿨을 동시에 함께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생각만 기특했을 뿐 현실성은 거의 없었다.

4년제 MBA와 로스쿨 통합 프로그램이 있긴 했지만, 비용 문제뿐 아니라 유학기간이 2배로 늘어나기 때문에 회사에서 허가받기 어려웠다.

UPENN에서 멀지 않은 곳에 Temple이라는 100년 전통의 대학에 저녁 로스쿨 프로그램이 있다고 해 검토해봤으나 밤거리가 위험하고 총소리도 가끔 난다고 하여 포기했다.

그리하여 잃어버린 시간 찾기의 두 번째 실천방안은 수강과목 외 강의를 가능한 한 많이 청강하는 것이었다.

신청 과목이나 제대로 소화하라는 충고도 있었지만, ‘내가 언제 또 와서 다양한 과목을 배워보겠나’싶어 회계, 마케팅, 부동산 강의를 열심히 쫓아다녔다.

특히 부동산 과목을 들을 때 언젠가 부동산과 증권을 연계시킨 상품과 시장을 만들고 싶다는 포부가 생겼는데, 5~6년 후 대우증권 기업금융본부 내에 부동산 부서를 만들면서 이 꿈이 현실화됐다.

가깝게 지내던 교회 교우들은 이런 내가 안쓰러웠는지 ''아내도 없이 혼자 지내는 사람이 너무 바쁘게 살다 건강을 잃으면 어떻게 하냐''며 걱정하면 오히려 나는 ''아직 잃어버린 시간의 반도 못 찾았다''라고 응수하곤 했다.

두 번째 학기를 바쁘게 마무리하던 무렵 서울에서 장모님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목소리가 밝지 않아 걱정스러운 마음에 무슨 일 있으신지 채근하는 내게 "사실은 자네 안 사람 가슴에 혹이 두 개 있는데, 병원 몇 군데에서 암인 것 같다는 판정을 받았다네"라고 하셨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놀란 나는 방학이 시작되자마자 회사에도,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귀국했다.

오자마자 바로 병원에 있는 의사 친구들을 만나 상의하며 국내에서 유방암에 관한 한 내로라하는 의대교수님이 집도하시는 수술 날짜를 어렵게 가까스로 잡았다.

그런데 어처구니없게도 아내가 수술 전날이 되자 갑자기 수술을 받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싸우기도 하고 달래기도 했지만 아내는 막무가내로 죽어도 수술을 안받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 고집을 잘 아는 나는 결국 방에서 담배 몇 대를 피우다 의사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친구는 "유신아, 아내가 그렇게 반대하면 하지 마라. 심리상태가 그러면 수술결과도 좋지 않을 수 있어."라며 나를 다독였다.

‘별 수 없다. 운명에 맡기자.’생각을 고쳐먹은 나는 다음날부터 3개월 간 방학 동안 특이한 잠행을 시작했다.

파란 반바지를 입고 큰 배낭을 멘 채, 매일 한강 고수부지에 나가 민들레를 뜯고 근처 야산에 올라 쑥, 질갱이, 닭장풀 등 산야초를 캐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내가 손수 캔 산야초에 몇가지 야채를 섞어 걸쭉한 녹즙을 갈아 아내에게 마시도록 했다.

직접 채취한 산야초의 생명력은 시장에서 내다파는 것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다고 들어 일단 만들기 시작했지만, 사실 그 맛이 엄청 써서 마시는 게 상당한 고역이었다.

그렇지만 내 노력을 가상히 여긴 아내는 하루에 4~5리터 이상씩 ''정유신표 산야초 야채 녹즙''을 아무말 없이 마셔줬다.

그리고 온갖 만류에도 불구하고 약국을 운영하면서 단식도 시작했는데, 한번 시작했다하면 5~6일씩 하기를 여러 차례 반복했다.

"당신, 정말 독한 여자야. 남자로 태어났으면 뭘 해도 크게 했겠어."라는 내 칭찬이 아내도 듣기 싫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15년도 훌쩍 지난 지금 회상해보면 그게 암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고, 우리는 웃으며 그 시절 이야기를 쉽게 하기도 하지만 당시 그 결정은 절대 쉽지 않은 것이었음은 분명하다.

사실 당시 나를 정말 힘들게 했던 것은 병이나 공포와 싸우는 것보다 양가의 갈등과 불신을 없애고자 고군분투했던 사실이다.

처가에서는 아내가 엄격한 집안에서 시집살이를 하며 고통을 참으면서 생긴 병이라며 화가 나 있었고, 본가에서는 ‘너무 자유분방하게 자란 철없는 며느리였다’며 이런 상황을 어이없어 했다.

''내가 서울에 있었다면, 이 상황까진 오지 않았을 텐데......''라는 자괴감이 나를 한없는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지금 생각해도 이것은 내 인생 일대 위기였음에 틀림없다.

이렇게 힘들었을 때 내게 큰 힘을 준 것은 다름아닌, 짧은 기간 미국에서 해 온 신앙이었다.

어려운 순간마다 교회에서 받았던 위안과 설교가 떠올랐고, 미국에 전화할 때마다 응원과 기도를 해주는 교우들의 목소리가 큰 힘과 위안이 됐다.

''그래, 살다보면 누구에게나 인생의 어려움과 역경이 오기 마련이다. 기왕에 겪는 것 제대로 겪으면서 좀 더 성숙한 사람이 되자''고 다짐했다.

당시 나를 지배하던 생각은 역경을 극복하고 순경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고통을 참고 이를 기쁘게 희생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었다.

<글. 정유신 스탠다드차타드증권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