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절한 규제 강화·구조적 문제 해결 함께 추진해야"
조선·해양업종이 대규모 부실을 쌓아오는 동안에 회계법인이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부실을 제때 드러내지 않고 감추는 기업의 교묘한 분식회계에 대해 회계법인들이 아무런 경고음을 내지 못한 채 사실상 한통속이 되어 '적정' 의견만 앵무새처럼반복해 온 무능함이 속속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무능한 수준을 넘어 일부 회계사들은 기업 내부정보를 활용해 주식투자에 나선범죄 행각도 드러났다. 또 회계법인 대표가 업무상 취득한 기업 정보를 유출한 의혹을 받는 등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가 심각한 지경이다.
최근 스위스 국제경영개발대학원(IMD)이 발표한 2016년 국제경쟁력 평가에서 우리나라는 '회계 및 감사의 적절성' 항목에서 꼴찌인 61위로 떨어지는 수모를 겪었다. 회계업계가 환골탈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한층 거세지는 이유다.
◇ 무능에 무책임…'사고뭉치' 된 회계법인들 6일 관련업계와 금융당국에 따르면 금융감독원은 2010년부터 대우조선해양[042660]의 외부 감사를 맡아 온 안진회계법인이 작년 대우조선해양의 새 경영진이 들어오고 나서 '회계절벽'을 스스로 드러내기 전까지 대규모 부실을 발견하지 못한 이유를 규명하기 위한 감리를 벌이고 있다.
안진은 뒤늦게 지난 3월 대우조선의 작년도 영업손실 5조5천억원 중 2조원을 2013년과 2014년 재무제표에 반영했어야 한다고 밝히며 정정을 요구하는 뒷북을 쳤다.
그럼에도 안진은 대우조선이 사실상 분식회계를 한 것을 방치한 책임을 피하기는 어렵게 됐다.
2011년 저축은행 부실이 드러났을 때도 회계법인의 감사보고서를 믿었던 후순위채권 투자자들은 분통을 터뜨렸다.
이들은 해당 회계법인을 상대로 소송을 걸기도 했다.
회계법인들은 조선과 해운업계가 누적된 대규모 부실을 이기지 못하고 구조조정에 들어가기 전까지 시장에 아무런 경고음을 울리지 못했다.
오히려 적정 의견을 남발함으로써 부실을 숨겨주는 데 일조했다.
회계업계는 부실 감사뿐만 아니라 일탈도 심심찮게 저질러 지탄받고 있다.
작년에는 이른바 '빅4' 회계법인 소속 젊은 회계사들이 감사를 맡았던 회사의내부정보를 돌려보며 주식투자에 이용한 사실이 검찰 수사로 드러나 처벌받기도 했다.
최근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가 사상 최대 규모의 조세회피처 자료인 '파나마 페이퍼스' 자료를 공개하면서 우리나라 기업들도 일부 해외 조세회피처에 페이퍼컴퍼니를 만든 사실이 알려졌다.
이와 관련해 해당 기업의 외부감사를 맡은 일부 회계법인도 의심스러운 시선을받고 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현재 국세청 조사가 진행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며 "해당기업이 조세피난처를 이용해 탈세한 사실이 실제로 드러난다면 도움을 준 컨설팅 회사나 회계사는 법적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 금융당국 "철퇴를 주질 않으니…" 금융당국은 회계법인들의 무능과 일탈이 드러나면서 회계 건전성에 대한 우려가커지고 있지만 솜방망이 처벌로 일관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
수조원대의 분식회계가 발생해도 회계법인이 받는 징계라고 해봤자 감사업무 제한 같은 경미한 조치밖에 없다.
2조원대의 분식회계를 한 STX조선해양의 외부감사를 맡은 삼정회계법인이 올해2월 받은 징계라고는 손해배상공동기금 30% 추가 적립과 STX조선해양에 대한 감사업무 제한 2년뿐이었다.
징계 결정에 앞서 열린 증권선물위원회에서 삼정 관계자는 "STX조선해양의 조직적인 감사 방해로 인해 회계부정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주장한 것으로 전해졌다.
회계업계의 한 관계자는 "보통 분식회계로 문제가 되면 회계법인들은 조직적 방해 때문에 분식을 알지 못했다고 변명하지만 외부 감사의 역할은 기업이 그런 속임수나 거짓말로 분식을 못하게 막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금융당국은 솜방망이 처벌이라는 비판에 대해 억울하다고 항변한다.
회계법인의 모럴 해저드나 부실 감사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려 법안 개정을 추진해도 '규제 강화'라는 지적을 받고 무산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가 2014년 10월 금융당국이 회계의 투명성과 신뢰성을 높이겠다며입법예고한 '주식회사의 외부감사에 관한 법률'(외감법) 개정안이다.
유한회사로 등록한 외국계 기업이 외부감사를 받아 그 결과를 공시하도록 하고부실 감사를 한 회계법인 대표를 징계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지만 올 3월 규제개혁위원회에서 핵심 내용이 줄줄이 '과도한 규제'라는 이유로 철회 권고를 받았다.
금감원의 감독 업무 근거가 외감법에 한정되는 문제도 있다.
최근 부실 감사에 연루된 회계법인들이 구조조정 대상 회사의 실사를 맡거나 컨설팅 업무를 하는 것에 대해 문제점을 지적하는 여론이 높았다.
하지만 이는 현행법상 금감원의 감독 범위를 벗어나는 일이다.
금감원 관계자는 "금감원의 업무는 외감법상 감사업무가 제대로 이뤄지고 있는지 감독하는 선으로 제한된다"며 "그 외 영역은 금융위원회나 한국공인회계사회에서관여할 부분"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금융위는 정책 관리를 우선으로 하는 행정기관이고 공인회계사회는 이익집단이라는 점에서 역시 한계가 있다.
◇ "구조적 문제 해결에 관심 둬야" 회계법계가 거듭나도록 하려면 적절한 규제 강화와 더불어 구조적인 문제점들을파악해 해결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회계법인의 저가 수주 경쟁으로 감사의 질이 저하되고 회계법인에 대해 피감 기업이 '갑'의 관계를 형성하는 현 상황에선 부실 감사는 어쩌면 필연적인 결과라는게 중론이다.
최근 삼일회계법인의 안경태 회장이 최은영 전 한진해운[117930] 회장(유수홀딩스[000700] 회장)에게 실사 대상 기업인 한진해운의 채권단 자율협약 신청 예정 정보를 귀띔해 보유주식을 처분토록 했다는 의혹의 바탕에는 회계법인과 기업주 사이에 형성된 '갑을 관계'가 있다는 얘기가 많다.
회계법인이 피감기업으로부터 수수료를 받는 것 자체가 문제라는 의견도 있다.
김상조 한성대 교수(경제개혁연대 소장)는 "피감 기업이 회계법인을 고르고 감사보수를 지급하는 '자유수임제'에서는 회계법인이 기업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며 "제한적으로 지정감사제가 일부 시행되고 있지만 자유수임제의 대안을 고민해 볼시점"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회계법인이 저가로 감사업무를 수임하면 회계사를 많이 투입하지 못하고, 이는 곧 부실 감사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며 "저가 수주 경쟁을 막을 방안도찾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한 대형 회계법인 소속 회계사는 "과거에는 회계사들이 고수익을 올리고 사회적평판도 좋았다고 하지만 요즘은 정말 '막노동' 수준의 노동강도에 시달리면서 좋은소리는 못 듣고 있다"고 했다.
그는 "회계업계의 직업윤리가 잘못됐다는 식의 접근보다는 업계 생태계 상의 문제는 없는지도 종합적으로 봐줬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banana@yna.co.kr(끝)<저 작 권 자(c)연 합 뉴 스. 무 단 전 재-재 배 포 금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