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순살. 논어에서 '이순(耳順)'이라 부르는 나이다. 귀가 순해져 남의 말을 쉽게 이해하고, 순순히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한국공인회계사회가 오는 11일 이순의 나이가 된다.
1954년 계리사 34명으로 걸음마를 시작해 이제는 1만8천여 명의 공인회계사, 140여 개 회계법인이 속한 전문가 단체로 성장했다.
공인회계사회의 현주소는 물론 또다른 60년을 위해 어떤 준비를 하는지 궁금해졌다. 서울 충정로에 있는 공인회계사회에서 강성원(66) 회장을 만나봤다.
감사 품질 향상, 감사 보수 현실화, 회계 투명성 확보에 이르기까지 현안은 산적해 있고 갈 길은 멀어 보였다. 강 회장은 공인회계사회가 나아갈 길을 담은 '지도'를 솔직하게 펼쳐보였다.
◇ 한때는 1등 신랑감이었는데…"감사는 비용 아닌 투자" 한때는 회계사가 Ƈ등 신랑감'으로 꼽혔다. 이제는 옛말이 됐다는 푸념도 나온다. 감사철 밤샘작업이 일상일 정도로 업무강도는 세지만 보수는 제자리걸음해서다.
강 회장은 "젊은 후배들의 SNS에는 '새벽에 퇴근해서 몇 시간 뒤 출근한다', '주말도 없고 결혼해도 매일 늦게 집에 간다'는 등의 고민이 등장한다"고 전했다.
기업들이 감사보수에 인색한 것은 회계업계 내 수주경쟁이 치열해진 것이 원인이지만, 외부감사를 기업가치를 높이는 '투자'가 아니라 되도록 절감할 '비용'으로여기는 풍토도 배경이 됐다. 심지어 감사를 '규제'로 간주하는 시각까지 있다.
강 회장은 최대 현안으로 '감사 품질 제고'와 '감사 보수 현실화'를 들었다.
두 가지는 별개 사안이 아니라 수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간다.
그는 "국내 대표기업의 감사보수가 회계선진국인 미국의 GE 등 글로벌 기업에비해 고작 20~30% 수준"이라며 "이 같은 현실은 감사를 비용으로 인식하는 사회적인식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강 회장은 그러면서 "문제가 있는 기업을 철저히 감사하다 보면 더 큰 사회적비용을 막을 수 있다"고 했다. 또 "감사보수는 결국 비용이 아닌 '투자'"라며 "감사를 통해 기업에 대한 투자자의 신뢰가 높아지면, 기업가치도 올라간다"고 덧붙였다.
이런 길은 이순의 연륜으로 귀를 열고 찾아낸 결과로 느껴졌다.
최근 회계교육사업에 몰두하는 것도 감사품질과 무관치 않다.
그는 "인식 전환을 위해선 회계 교육이 필요하다"고 했다. 지난해 초등학생을대상으로 경제·회계 교육을 시작했고 올해는 고등학생으로 확대했다. 법무연수원에이어 내년에는 사법연수원에서도 한다. 언론인을 상대로 회계 아카데미를 열기도 했다. 강 회장은 "반응이 아주 좋다"고 말했다.
변화 조짐도 있다. 정태영 사장이 이끄는 현대캐피탈 등 관계사 3곳이 지난 봄에 감사보수를 3배 가까이 올린 게 대표적이다.
◇ "선순환"…감사품질 제고→보수 현실화→기업가치·시장 투명성 제고 강 회장이 감사보수 현실화, 감사품질 향상을 위해 찾아낸 방법은 감사시간에있었다. 그는 "감사시간을 제대로 투입하면 품질이 유지된다"며 "품질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면 감사보수는 서서히 오를 것"이라고 장담했다.
공인회계사회는 감사 품질 향상을 위한 실천 방안으로 '평균 감사 투입시간 지침' 카드를 꺼내들었다. 감사 대상 기업의 업종·자산 규모에 따라 적정한 감사 투입시간을 정한 것이다.
삼일, 딜로이트안진, 삼정KPMG, EY한영 등 '빅4' 회계법인의 감사 투입 시간을집계한 뒤 업종·규모별로 낸 평균치가 기준이다. 2012년부터 지금까지 매년 140여개 회계법인에 지침을 전달했다.
올해는 그 강도를 높여 사실상 법제화를 지향하는 모습이다. 강 회장은 "올해는지침을 따르지 않는 회계법인의 명단을 금융감독원에 보내 특별 감리를 요청할 것"이라며 "비상장사에 대해서는 우리가 직접 감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또 300세대 이상의 공동주택, 학교 법인 등 특별법 관련 감리 대상에 대해서는'최소' 감사 투입 시간을 정하고, 지침을 따르지 않으면 역시 금감원에 특별 감리를요청하는 방안을 구상 중이다.
감사 품질을 높이려면 외부감사인이 회사 재무제표를 대신 작성해주는 비정상적관행도 사라져야 한다고 강 회장은 강조했다. 외부감사인이 재무제표까지 만들어주다 보면 본연의 업무인 감사에 들여야 하는 시간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최근 법 개정으로 대리작성은 위법이 됐다. 금융당국은 이런 사실을 담은 공문을 기업 최고경영자에게 보냈고 회계사회는 회계법인에 알려 협조를 구했다.
강 회장은 "회장 취임 이후에 줄기차게 요구했던 사안"이라며 "대리작성 신고센터를 만들어놓는 한편 스스로 재무제표 작성이 어려운 곳은 지원센터를 통해 도울것"이라고 말했다.
◇ 늦깎이 회계사에 명예시인…"숫자만으론 답 안 나와…인문학 소양 넓혀야" 강 회장은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다. 서울 상대를 나와 인물 많기로 유명한 행정고시 10회로 공직생활을 하다가, 뒤늦게 회계사가 되어서다.
왜 그랬을까. 그는 "그런 질문을 많이 받는다"며 "국세청에서 15년 가까이 일했을 때 가장 큰 회계법인이었던 안권회계법인 대표로부터 같이 일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모험을 한 것"이라고 말했다.
강 회장은 "자리를 옮긴 뒤 회계사시험에 도전했지만 첫해에는 떨어졌고, 이듬해인 1987년에 합격했다. 그때 마흔 살이었다"며 미소를 지었다.
'늦깎이' 회계사가 됐지만, 일에 대한 열정은 대단했다고 한다.
회계사로 변신해 30년 가까이 살아온 강 회장에게는 '명예 시인'이라는 특이 이력이 하나 더 있다. 그는 매일 330개의 시를 순서대로 암송한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출·퇴근 시간에, 산책을 하면서….
그는 "시를 가까이하다 보니, 고은, 김남조, 김초혜 시인께서 '시인보다 시를사랑한다'며 시인으로 초청해주신 것"이라고 설명했다.
강 회장은 "숫자만 봐서는 답이 안 나온다. 숨은 뜻을 생각해야 한다"며 "인문학적 소양을 넓혀 창의적인 사고를 해야, 서비스의 질을 높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더니 즉석에서 시 한 편을 읊었다.
"…이 하루는 저 강물의 한 방울이 어느 산골짝 옹달샘에 이어져 있고 아득한푸른 바다에 이어져 있듯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하나이다. 이렇듯 나의 오늘은 영원속에 이어져 바로 시방 나는 그 영원을 살고 있다…" 구상 시인의 '오늘'이라는 시다. 오는 11일 한국공인회계사회 60주년 행사에서낭송될 작품이다. 강 회장은 "이 시 속에는 회계사회의 지난 60년과 오늘, 미래가담겨 있다"면서 "전문가 집단으로 나아가기 위해 오늘을 쌓는 것이 영원을 사는 길"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prince@yna.co.kr, gogogo@yna.co.kr(끝)<저 작 권 자(c)연 합 뉴 스. 무 단 전 재-재 배 포 금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