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반도체 초호황’에 힘입어 깜짝 성장을 기록하고 있는 한국 경제가 2030년부터는 ‘마이너스 성장’ 수렁에 빠질 수 있다는 경고가 나왔다. 급속한 인구 고령화에 반도체·자동차를 제외한 주력산업의 경쟁력 약화가 겹친 결과라는 진단이다. 경제학계에서는 정부가 기업의 투자 위험을 분담하고 규제를 완화하는 한편 정책의 예측 가능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성장전략을 전환해야 한다는 제언이 나왔다.
12일 한국개발연구원(KDI)과 니어재단, 한국경제학회가 서울 대한상공회의소에서 개최한 '한국경제: 지금 서 있는 곳, 가야 할 길' 경제포럼에서 김미루 KDI 거시·금융정책연구부 연구위원은 "한국 경제의 장기성장률은 지난 30년간 추세적으로 하락해 왔다"며 "이러한 흐름을 바꾸지 못하면 2030년부터는 마이너스 성장에 진입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김 연구위원은 한국 경제의 장기성장률이 5년마다 1%포인트씩 하락한다는 김세직 KDI 원장의 '5년 1%포인트 하락의 법칙'을 바탕으로 이같이 분석했다.
성장 여력 감소의 원인으로 기술 혁신 둔화와 생산성 하락을 꼽았다. 김 연구위원은 “잠재성장률 하락은 생산성이 줄어든 데서 비롯했다”며 “생산가능인구 감소에 따른 노동공급 축소도 잠재성장률을 끌어내리는 요인"이라고 설명했다.
이 같은 성장동력 약화는 한국 경제의 주력인 제조업에서 더욱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권남훈 산업연구원 원장은 "한국 산업부문의 생산과 수출은 2010년부터 둔화했고, 2011~2025년 반도체와 자동차를 제외한 산업부문의 수출은 거의 증가하지 않았다"며 "석유화학과 철강, 배터리 등 주요 산업에서는 최근 수년간 설비가동률이 낮아졌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제조업 경쟁력 약화는 세계 수요의 구조적 둔화에 더해 중국을 중심으로 생산설비가 과잉 확충된 영향"이라며 "반도체를 제외한 한국 산업의 경쟁력은 정체 또는 하락세에 접어들었고, 반도체 호황은 이를 직시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고 지적했다.
경제학자들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과감한 규제 정비와 정책의 일관성 확보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정철 한국경제연구원장은 "기업이 성장할수록 규제와 의무가 급격히 늘어나는 이른바 '규제 문턱'을 점검해야 한다"며 "기존 사전규제는 유지한 채 사후제재까지 추가하는 '규제 누적'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실증으로 안전성이 확인된 분야의 진입규제를 완화하고 기업을 위축시키는 경제형벌을 국제 기준에 맞게 합리화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김소영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정부 정책이 너무 자주 바뀌면 경제주체가 미래를 예측하기 어려워지고, 이는 시장경제에 불확실성을 키워 투자와 장기 계약을 위축시킨다"며 "정책환경의 예측 가능성이 낮아 투자가 충분히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인구와 연금, 에너지, 산업전환을 비롯한 장기 과제에 대해서는 정권과 관계없이 일관된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부가 미래 혁신을 이끄는 '기업가형 국가' 역할을 강화해야 한다는 제언도 나왔다. 마리아나 마추카토 영국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UCL) 교수가 2013년 펴낸 저서에서 제시한 개념으로 정부가 민간의 혁신을 뒷받침하는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강성진 한국경제학회 회장(고려대 경제학과 교수)은 "민간이 감당하기 어려운 혁신의 위험을 분담하고 새로운 기술과 시장 형성을 이끄는 '기업가형 국가'의 역할이 더 중요해지고 있다"며 "인공지능(AI)·첨단반도체·바이오 등 초기 투자와 장기간의 연구개발이 필요한 분야에 정부가 기초연구와 인프라를 지원하고, 민간은 사업화에 나서야 한다"고 제언했다.
김익환 기자 lovep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