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 무대 위로 소환된 SNS 시대의 폭력, 연극 '에너미'가 온다

입력 2026-10-07 13:53
"안 가본 바다에 창작진과 배우들이 함께 빠져보려 한다." (이준우 연출)

스마트폰 화면 하나면 온 세상의 실시간 여론과 알고리즘이 손안에서 요동치는 최첨단 디지털 시대, 가장 원시적이고 아날로그적인 장르인 연극 무대 위에서 이를 구현하겠다고 나선 이들이 있다. 대극장의 방대한 공간에서 SNS의 폭력을 다뤄야 하는 모험을 앞두고 서울시극단 연극 '에너미'가 6일 세종문화회관 예술동에서 기자간담회를 통해 베일을 벗었다.




당초 서울시극단과 함께 고전 '욕망이란 이름의 전차'를 재창작한 신작 '아파트'를 오랜 시간 준비해 왔던 이준우 연출과 강훈구 작가는 치열한 논의 끝에 방향을 선회했다.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오래된 질문을 던지기에 '민중의 적'이라는 원작이 오늘날의 한국 사회와 더욱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헨리크 입센의 고전 명작을 동시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한 '에너미'는 19세기 말 신문과 시민 집회를 중심으로 전개되던 원작의 뼈대를 유지하면서도, 무대를 SNS와 실시간 라이브 방송 등 디지털 미디어 환경으로 과감하게 확장했다. 원작의 온천 개발 설정은 오늘날 대형 리조트 건설 문제로 바뀌었고, 인쇄업자는 대형 유튜버로 변모했다.

극은 주인공이 지역 사회를 뒤흔들 진실을 알게 된 순간부터 공동체 전체에게 맹렬한 뭇매를 맞고 버림받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채 24시간도 되지 않는 숨 가쁜 속도감 속에 풀어낸다. 존경받던 지역 사회의 구성원에서 순식간에 '민중의 적'으로 추락하는 커스틴의 하루가 관객들의 숨통을 조일 예정이다.



연출을 맡은 이준우는 전작 '빅마더'(2025)에 이어 알고리즘과 SNS의 바다를 살아가는 현대 사회의 단면을 무대 위로 소환했다. 원작 속 남성 주인공을 여성인 커스틴으로 변경한 것에 대해 "여성에 대한 전문성을 의심하는 시선, 자매 간의 갈등과 딸 페트라와의 모녀 관계 등을 통해 입체적인 갈등을 보여주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연극 무대에서 미디어 폭력의 공포심을 시청각적으로 풀어내는 점은 이번 공연의 볼거리다. 번역과 윤색을 맡은 강훈구는 "하루 만에 영웅에서 나락으로 떨어지는 재밌고도 무서운 시대상 속에서 누가 진짜 민중의 적일까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배우들의 각오 또한 남다르다. 주인공 커스틴을 맡은 문소리는 이날 간담회에서 "연습을 거듭할수록 이 고전이 왜 클래식인지 알게 된다"며 "막대한 속도감과 공포심 속에서 각자의 신념과 진실이 무엇인지 돌아보게 될 것"이라고 전했다.

28년 전 서울시극단에서 원작 '민중의 적' 공연에 참여했던 배우 강신구 역시 "다수는 결코 옳지 않다는 주제의식이 오늘날의 사회에 더 어울릴 것"이라며 공감을 더했다.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펼쳐지는 이번 공연은 오는 26일 개막해 11월 14일까지 이어진다.

이해원 기자 um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