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장기 국채금리가 20여년 만에 최고 수준으로 치솟으면서 투자자들의 셈법이 복잡해졌다. 안전자산인 국채만 사도 연 5%가 넘는 이자를 기대할 수 있게 되자 증권가에서는 주식과 채권 모두 투자 대상을 선별해야 한다는 조언이 나온다.
3일 한경 에픽AI를 통해 국내 증권사들의 투자전략 보고서를 종합한 결과, 증권가는 현재 시장을 주식을 모두 피해야 하는 국면보다는 종목 간 차별화가 강해지는 시기로 진단했다. 주식은 실적이 뒷받침되는 AI와 반도체, 금융주 등으로 압축하고 채권은 가격 변동성이 큰 장기물보다 단기물을 활용하는 전략이 유효하다는 분석이다.
지난달 말 미국 10년 만기 국채금리는 연 5.2%대, 30년물 금리는 연 5.5%대까지 뛰었다. 2002년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다.
장기금리를 끌어올린 요인은 하나가 아니다. 고유가에 따른 인플레이션 우려와 미국의 재정적자 확대, 국채 공급 증가가 겹쳤다. AI 데이터센터 투자를 확대하는 빅테크 기업들의 회사채 발행이 늘면서 채권시장 내 자금 유치 경쟁도 치열해졌다. 미국 재무부의 국채 입찰 부진과 바이백 정책에 대한 실망감도 금리 상승 압력을 키웠다. 재정과 물가, 채권 공급이라는 구조적 요인이 맞물린 만큼 금리가 단기간에 크게 내려가기 어렵다는 관측이 나온다. 국채만 사도 5%…주식 매력 '뚝'국채금리가 오르면 주식의 상대적인 투자 매력은 낮아진다. 주가 하락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도 국채에서 높은 수익률을 얻을 수 있어서다.
IBK투자증권에 따르면 미국 10년물 국채금리와 S&P500 이익수익률의 차이인 일드갭이 0%포인트 부근까지 좁혀졌다. 2023년 10월 미국 국채금리 급등으로 증시가 압박받았던 당시와 비슷한 수준이다.
일드갭은 주식 투자로 기대할 수 있는 이익수익률에서 국채금리를 뺀 값이다. 예컨대 S&P500 이익수익률이 5.3%이고 10년물 국채금리가 5.2%라면 일드갭은 0.1%포인트에 그친다. 위험을 감수하면서 주식을 보유할 유인이 줄었다는 의미다.
고금리 국면에서는 주식시장 상승의 범위가 좁아질 가능성이 크다는 게 유진투자증권의 설명이다. 때문에 재무구조가 건전하고 이익 증가 속도가 빠른 대형 우량주를 중심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높은 금리에도 제품 가격을 올릴 수 있는 가격 결정력을 갖춘 기업이 유리하다고 봤다. 업종별로는 기술과 에너지가 소비재보다 상대적으로 강할 것으로 예상했다.
국내 증시에서는 자기자본이익률(ROE)이 높고 밸류에이션 부담이 낮은 반도체와 증권, 조선, 에너지 업종을 관심 대상으로 제시했다. 금리 부담을 상쇄할 만큼 이익이 늘어날 수 있는지가 핵심이라는 판단이다. AI주는 금리에 무뎌졌다…"결국 실적"미국 증시에서는 AI와 반도체 업종이 고금리 충격을 견딜 후보로 꼽혔다. 금리 상승은 미래 이익을 현재 가치로 환산하는 할인율을 높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성장주에 불리하다. 하지만 AI 기업의 이익 증가 속도가 금리에 따른 가치 하락을 상쇄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NH투자증권에 따르면 테크 업종을 중심으로 2027년에도 S&P500 기업들의 두 자릿수 이익 성장이 이어질 전망이다. 하이퍼스케일러의 설비투자 확대와 견조한 마진율이 유지된다면 AI 사이클을 중심으로 안정적인 주가 흐름을 기대할 수 있다고 봤다.
AI 투자 사이클이 시작된 이후 기술·커뮤니케이션 업종 주가의 금리 민감도가 과거보다 낮아졌다는 분석도 내놨다. 금리가 올랐는데도 관련 주가가 버틴 것은 견조한 이익 성장이 할인율 부담을 상쇄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DB증권은 글로벌 장기금리 급등에도 위험자산시장이 크게 흔들리지 않고 있다고 평가했다. 미국 기술주와 메모리 반도체 관련 종목이 중간선거 이후 대세 상승을 준비하는 국면에 진입했다며 미국 정보기술 섹터에 대한 선호를 밝혔다.
대신 'AI'라는 이름만 붙은 종목을 무조건 매수하는 전략은 경계해야 한다. 높은 금리가 이어지면 매출보다 투자비용이 빠르게 늘거나 현금흐름이 부족한 기업은 주가가 크게 조정받을 수 있어서다. AI 업종 안에서도 실제 매출과 영업이익, 현금창출력을 확인해야 한다는 얘기다. 금융주는 수혜 기대…장기채는 "떨어지는 칼날"국내 금융주도 고금리 국면의 대안으로 거론됐다. 은행과 보험사는 시장금리가 상승하면 운용수익률과 이자이익이 개선될 가능성이 있다.
DB증권은 국내 주식 가운데 금리 상승의 수혜가 예상되는 은행과 보험 업종에 대한 선호를 제시했다. 개별 종목의 변동성이 부담스럽다면 관련 상장지수펀드(ETF)를 활용해 분산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금리 상승이 모든 금융회사에 호재인 것은 아니다. 대출 연체율이 오르거나 보유 채권의 평가손실이 커지면 실적에 부담을 줄 수 있다. 금융회사별 건전성과 충당금 규모를 함께 확인해야 한다.
채권시장에서는 만기가 긴 상품보다 단기물이 상대적으로 유리하다는 의견이 나왔다. DB증권은 원화 단기 국채와 단기 AA급 회사채처럼 금리 변화에 따른 가격 변동이 작은 자산을 선호한다고 밝혔다.
반대로 국내외 장기채를 두고는 '떨어지는 칼날'이라고 표현했다. 금리가 높아져 이자 매력은 커졌지만 금리가 추가로 오르면 채권 가격이 더 떨어질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채권 가격은 금리와 반대로 움직인다. 만기가 길수록 금리 변화에 따른 가격 변동 폭도 커진다. 금리가 고점에 가까워졌다는 판단만 믿고 장기채를 매수했다가 금리가 더 오르면 상당 기간 평가손실을 감수할 수 있다. "금리 수준보다 상승 속도가 문제"금리 상승 충격이 이미 시장에 상당 부분 반영됐다는 분석도 있다.
신한투자증권은 최근 주식시장에 부담을 준 요인은 금리 수준 자체보다 실질금리가 빠르게 오른 속도였다고 진단했다. 급격한 상승 충격이 주가와 투자자의 포지션에 상당 부분 반영됐다면 4분기에는 3분기만큼 금리가 증시를 압박하지 않을 수 있다고 내다봤다.
미국 재정적자와 국채 공급 증가가 지속되면 금리 상승 압력이 다시 커질 수 있다. 금리가 추가로 급등하면 AI와 반도체처럼 실적이 좋은 업종도 단기적인 주가 조정을 피하기 어렵다.
이송렬 한경닷컴 기자 yisr0203@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