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제가 죽어야 해주실 건가요"…몇 년째 멈춘 경찰 수사 [이정우의 중대사안]

입력 2026-10-05 12:38
수정 2026-10-05 12:42
"제가 죽어야 사건에 관심을 갖고 경찰이 수사에 나서줄까요?"

한 스타트업 대표 이모 씨는 한경닷컴에 이같이 토로했다. 앞서 이 씨는 전 공동대표가 코로나19 확산 초기 회사로 들어온 1000억원대 마스크 수출 계약을 가족 명의 필리핀 법인으로 빼돌렸다며 2023년 8월 인천경찰청에 배임 등 혐의로 고소했다. 당시 그는 필리핀 법인의 마스크 구매대금 송금증, 날인된 계약서, 피의자가 마스크 공급업체 임원에게 송금한 계좌 기록 등도 함께 제출했다.

다만 경찰은 피의자가 혐의를 부인하고 있고 필리핀 법인 계좌에 잔액이 없다며 사건을 불송치했다. 이후 회사 측 이의신청으로 사건이 검찰로 넘어갔고 검사는 2024년 3월 경찰에 보완수사를 요구했다. 경찰은 필리핀 법인 계좌를 확인하기 위해 인터폴에 국제공조를 요청한 뒤 회신이 올 때까지 수사를 중지했다. 그렇게 사건은 지금까지 제자리다.

경찰의 수사중지 결정 건수가 지난해 12만 건을 넘어선 것으로 나타났다. 검찰청 폐지와 개정 형사소송법 시행으로 검찰이 수사하던 사건 일부까지 경찰로 이관되면서 수사중지 결정도 향후 더 늘어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 연 12만건 넘은 수사중지 결정…4년 새 50% 증가 5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속 박상웅 국민의힘 의원이 경찰청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경찰의 수사중지 결정 건수는 지난해 12만3286건에 달했다. 제도가 생긴 2021년(8만2195건)보다 4년 새 50.0% 늘었다. 연도별로는 △2022년 7만7812건 △2023년 8만1852건 △2024년 10만5588건 △지난해 12만3286건으로 2023년 이후 증가세를 보였다. 올해도 8월까지 7만9951건에 이른다.

수사중지는 피의자나 참고인의 소재를 알 수 없거나, 중요 증거가 외국에 있어 확보하는 데 상당한 시일이 걸리는 등 수사를 마무리할 수 없을 때 경찰이 내리는 결정이다. 2021년 검경 수사권 조정으로 검사의 수사지휘와 전건송치가 폐지되고 경찰에 1차 수사종결권이 부여되면서 도입됐다.

경찰청이 제출한 주요 사례를 보면 2019년부터 2024년 7월까지 필리핀·멕시코 등에서 30억원 상당의 마약류를 들여와 판매한 혐의를 받는 피의자에 대한 수사는 해외 체류를 이유로 중지됐다. 또 2004년 충북 영동군 채무 관련 살인 사건과 2008년 서울 서초구 전처 살해 사건은 피의자 소재 불명으로 수사가 중단됐다.

경찰청 관계자는 수사중지 결정 건수가 늘어난 배경으로 2023년 수사준칙 개정을 들었다. 경찰이 고소·고발 사건을 반려하지 못하고 접수·수리하도록 하면서 처리 사건 수가 급증했고, 이에 따라 수사중지 건수도 증가했다는 설명이다. ◇ 재개 판단에 수사관 재량 작용할 여지도 현행 수사준칙과 경찰수사규칙에 따르면 경찰은 수사중지 사유가 해소될 때까지 수사를 중지할 수 있고, 사유가 해소되면 수사를 재개해야 한다. 당초 중지 사유가 해소되지 않았더라도 예외적으로 수사를 재개할 수 있다. 피의자 특정에 필요한 중요 증거자료가 외국에 있어 수사를 중지했으나 다른 단서로 피의자가 특정된 경우 등이 이에 해당한다.

다만 고소인이 중지 사유를 대신할 만한 증거를 새로 내더라도 이를 사유 해소로 볼지는 수사관 판단에 좌우될 여지가 있다. 경찰청 관계자도 "개별 사건에 대해 수사하는 수사관이 판단하는 영역이 분명히 있기는 하다"고 말했다.

실제 이 씨 사건의 경우에도 그는 피의자 가족 명의 페이퍼컴퍼니가 필리핀으로 수출한 기록, 피의자와 페이퍼컴퍼니가 동시에 수억원대 다른 해외법인 지분을 취득한 내역 등을 추가로 제출하며 수사 재개를 요청했다. 다만 경찰은 "수사중지 사유를 해소하거나 대체할 수 있을 정도의 자료로 보긴 어렵다"고 했다. 국제공조 회신이 언제 올지 등의 설명 없이 수년째 사실상 기다리라고만 한 것이다.

이 씨는 "명확한 증거가 있는 사건이기 때문에 결국은 바로잡힐 수 있겠지 하는 희망이 있어 버티고 있다"면서도 "수사가 언제 재개될지 기약이 없는 사이 창업 3년 만에 '1000만불 수출의 탑'을 수상받고 직원 40명을 뒀던 회사는 폐업에 준하는 상태가 됐다"고 전했다. ◇ 檢 사건 이관에 수사중지 증가 우려 경찰의 수사중지 결정은 앞으로 더 늘어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지난 2일 개정 형사소송법 시행으로 검사의 수사권이 폐지되며 검찰이 수사하던 사건이 경찰 등 수사 권한이 있는 기관으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이에 경찰청 관계자는 "실질적으로 경찰에 사건이 이송되는 것은 검사가 수사를 개시한 사건인데 그 사건은 그렇게 많지 않다"며 "수사중지 결정 건수에 큰 영향을 미치진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다만 새로 출범한 중대범죄수사청은 인력 확보부터 난항을 겪고 있다. 법조계에 따르면 1·2차 특례임용 신청자는 정원의 68.3%인 1962명에 그쳤다. 중수청이 자리 잡기 전까지 경찰 등 기존 수사기관에 과부하가 걸릴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이에 정치권에서는 수사중지 제도 보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박상웅 의원은 "수사중지는 사건을 끝내는 게 아니라 잠시 멈추는 것인데 재개 여부에 수사관 판단이 크게 작용할 수밖에 없어 피해자에게는 사실상 종결처럼 느껴질 수 있다"며 "검찰청 폐지로 경찰 수사를 견제할 수 있는 장치까지 줄어든 만큼 장기 중지 사건을 주기적으로 점검하고 재개 기준을 명확히 하는 제도 보완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중대사안'은 사법(司)·안보(安) 이슈를 짚습니다. 검찰청 폐지·국군사관학교 통합 같은 굵직한 변화부터 사소하지만 그냥 지나치기엔 아쉬운 이야기까지, 이정우 기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을 기록하겠습니다.
이정우 한경닷컴 기자 krse9059@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