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상 옷을 잘 입는다는 건 ‘잘 어울릴 만한 것’들을 알맞게 골라 매치하는 일이다. 슈트에는 구두를 신고, 퍼에는 드레스나 슬랙스를 받쳐 입는 식이다. 스포티한 바람막이와 레이스 스커트는 좀처럼 한 착장에 등장할 일이 없다. 하지만 올가을엔 이 공식이 뒤집힌다. 서로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옷을 일부러 함께 입는 것이 새로운 스타일로 떠올랐다. 지겨워진 ‘콰이어트 럭셔리’
한동안 패션계를 지배한 것은 로고와 장식을 덜어내고 완벽한 절제와 정돈을 앞세운 ‘콰이어트 럭셔리’였다. 비슷한 색과 소재를 정교하게 맞춰 빈틈없이 완성하는 것이 세련됨의 기준이었다. 최근엔 패션이 그 정반대 흐름으로 움직이고 있다. 퍼와 데님, 새틴과 가죽, 성긴 니트와 반듯한 테일러링처럼 촉감부터 다른 소재를 한 착장 안에서 일부러 부딪치게 한다. 장식과 볼륨도 한층 과감해졌다. 매끈하게 정돈하기보다 약간의 어긋남을 남기는 것이다.
이런 흐름은 인공지능(AI)이 점점 더 완벽에 가까운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시대와도 맞물린다. AI는 색과 비율, 취향을 분석해 가장 그럴듯하고 잘 어울릴 만한 조합을 제안한다. 패션은 오히려 그 완벽함에서 한 발 비켜선다. 조금 거칠고, 조금 흐트러지고, 예상과 다른 조합에서 사람이 개입한 흔적을 찾는다.
이른바 ‘패러독스 드레싱’ 트렌드다. 서로 다른 격식과 장르뿐 아니라 상반된 질감까지 한 착장 안에서 의도적으로 충돌시키는 방식이다. 테일러드 재킷 아래 후드 집업을 겹쳐 입고, 매끄러운 실크나 새틴 스커트에는 투박한 가죽 재킷을 걸친다.
삼성물산 패션부문의 여성복 브랜드 구호플러스는 올해 가을·겨울(FW) 캠페인에서 풍성한 페이크 퍼 재킷에 여유로운 실루엣의 데님 팬츠를 매치했다. 과거라면 드레스와 함께 입었을 만한 퍼를 일상적인 청바지와 조합해 한층 캐주얼하게 풀어냈다.
올해 FW 런웨이에서는 기존에 정형화된 스타일링 공식이 잇달아 깨졌다. 프랑스 패션 브랜드 아미(Ami)는 풍성한 테일러링 코트와 슈트에 빈티지 볼캡과 스니커즈를 더했다. 런웨이에 슈트와 블레이저, 코트에 야구모자를 조합한 룩을 반복적으로 등장시켰는데, 정교하게 각을 잡은 슈트 특유의 긴장감을 편안한 스포츠 아이템으로 흐트러뜨린 시도다.
뉴욕 패션계에서 주목받는 카이트(KHAITE)는 아예 어긋난 핏과 낯선 조합을 브랜드의 기본 문법으로 삼았다. 창립자 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캐서린 홀스타인은 “옷을 입는 올바른 방식이 무엇이냐”며 “의도적으로 비틀리고 어긋난 ‘배드 핏(bad fits)’을 시도했다”고 설명했다. 반듯하게 정리된 비율 대신 예상에서 살짝 벗어난 실루엣과 균형에서 긴장감을 만든 것이다. 시간의 경계도 허문다장르뿐 아니라 시간의 경계도 넘나든다. LF가 수입하는 바네사브루노는 1996년 브랜드 론칭 당시 선보인 첫 가죽 가방 ‘룬 백’을 30년 만에 다시 꺼냈다. 올해 FW 컬렉션에선 과거의 자유분방한 보헤미안 감성을 현대적인 일상복과 결합한 ‘모던 보호(Modern Boho)’를 내세웠다. 장식적인 러플 블라우스에 오래전 유행했던 빳빳한 생지 데님을 매치했다. 오래된 디자인에는 인간이 지나온 시간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요즘 브랜드들이 오히려 시간이 쌓인 아카이브를 다시 들여다보는 이유다.
패러독스 드레싱은 큰돈을 들이지 않고도 트렌디해질 수 있다는 점이 매력이다. 시즌마다 새 아이템을 사들이는 대신 옷장 속 익숙한 옷들을 낯선 방식으로 다시 조합하면 된다. 어제 입은 슈트를 오늘은 볼캡과 스니커즈와 조합하고, 오래돼 옷장 속에만 있던 데님은 화려한 퍼와 매치해 전혀 다른 옷처럼 입을 수 있다. 지출을 크게 늘리지 않으면서도 유행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올가을의 멋은 빈틈없이 완성된 스타일에 맞춰 입었느냐보다 얼마나 자연스럽게 어긋날 수 있느냐에 있다. ‘이게 어울릴까’ 주저하지 말고 제멋대로 입어보자. 완벽하게 계산된 이미지가 넘쳐날수록 조금 어긋나고 예상 밖인 조합은 오히려 눈에 들어온다. 완벽하지 않아서 더 인간적인 것, 그것이 올가을 패션이 발견한 새로운 멋이다.
안혜원 기자 anh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