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중견기업이 대기업으로 성장하더라도 최초 5년간 중견기업 지위와 혜택을 그대로 유지해 주는 ‘졸업유예’ 제도를 사상 처음 도입한다. 기업 규모가 커질수록 지원은 끊기고 규제만 쏟아져 성장을 꺼리는 이른바 ‘피터팬 증후군’을 깨기 위한 조치다. 이와 함께 1조원 규모의 초격차 R&D 프로젝트를 가동해 글로벌 공급망을 쥐락펴락하는 ‘슈퍼 을(乙)’ 중견기업을 집중 육성하기로 했다. ○5년간 대기업 규제 유예산업통상부는 1일 충남 아산에 위치한 반도체 후공정 중견기업 하나마이크론에서 김정관 장관 주재로 간담회를 열고 이 같은 내용을 담은 ‘제3차 중견기업 성장촉진 기본계획(2026~2030)’을 발표했다. 이번 대책의 핵심은 무너진 ‘기업 성장사다리’의 복원이다. 중견기업은 국내 전체 기업 수의 1.5%에 불과하지만 수출의 18%, 제조업 공급망(소부장)의 85%를 책임지는 경제의 허리다.
하지만 중견기업이 공정거래법상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 등 대기업 요건에 도달하는 순간, 연구개발(R&D)과 시설투자 세액공제율이 급감하는 지원 절벽을 맞닥뜨린다. 반면 상호출자·순환출자 금지와 금융·보험사 의결권 제한 등 경제력 집중 규제와 자본시장법상 사모펀드(PEF) 출자 제한 등 수백 가지 규제 벽에 한꺼번에 부딪힌다. 이 때문에 성장을 멈추고 중소기업으로 유턴하거나 기업을 쪼개는 부작용이 속출했다.
정부는 중견기업법을 개정해 대기업에 진입하더라도 5년간 중견기업 지위를 인정하는 ‘성장통 완충장치’를 신설하기로 했다. 중견 후보기업부터 초보 중견, 선도 중견기업까지 성장 단계별 맞춤형 지원도 연계한다. 중견 후보기업에는 중소기업 R&D 성과를 양산 평가로 연결해 주고, 선도 중견기업에는 해외 대형 프로젝트 입찰 준비와 수주 보증을 집중 지원하는 방식이다.
지역 중견기업 육성에도 팔을 걷어붙인다. 수도권 집중을 완화하기 위해 ‘5극 3특’ 전략과 연계해 비수도권 핵심 중견기업에 정책금융과 인프라 등 13조7000억원 이상의 투자를 뒷받침할 계획이다. ○1조 투입해 ‘데카코어’ 육성글로벌 공급망 재편에 맞서 독자 기술력을 갖춘 ‘앵커형 중견기업’을 키우기 위한 대형 프로젝트도 가동된다. 정부는 2027년부터 2035년까지 총 1조원을 투입하는 ‘데카코어(Deca-core) 프로젝트’를 추진한다. 대학과 연구기관, 중견기업이 원팀을 이뤄 개별 부품 단위를 넘어 시스템 단위의 10대 초격차 기술을 확보하는 국가 연구개발 사업이다.
무역 데이터와 현장 수요를 바탕으로 해외 의존도가 높거나 공급망 병목이 심한 품목을 발굴해 원천기술 개발부터 글로벌 수요기업 채택까지 전주기를 밀착 지원할 방침이다. 급변하는 산업 패러다임에 맞춰 2030년까지 제조원청 중견기업의 절반에 달하는 약 350개사를 대상으로 인공지능(AI) 모델을 제조 현장에 접목하는 ‘제조 AI 전환(MAX)’도 본격화한다.
김 장관은 이날 간담회에서 “중견기업은 중소기업의 유연성과 대기업의 자본·기술력을 고루 갖춰 우리 경제에 혁신을 불어넣을 주체”라며 “기업의 성장이 곧 국가경제 전체의 성장인 만큼, 중견기업이 독자 기술력을 갖춘 글로벌 앵커기업으로 도약하도록 성장사다리를 놓겠다”고 강조했다.
정부는 이날 간담회에 앞서 코미코, 원익홀딩스, 삼진제약, 휴메딕스, 새한산업, 진합 등 10개사를 ‘2026년 월드클래스 플러스’ 신규 기업으로 선정하고 기업당 최대 50억원의 R&D 자금을 지원하기로 했다.
중견기업 졸업유예 제도가 실제 안착하기까지는 국회 문턱을 넘어야 한다. 공정거래법 등 타 부처 소관 대기업 차등규제 법령과의 충돌을 조정하고 세법 개정을 병행해야 하는 과제가 남아 있어, 입법 과정에서 유예 혜택의 구체적인 범위가 최종 조율될 전망이다.
김리안 기자 knr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