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기업 FP&A의 현실과 과제 [이장환 박사의 FP&A 인사이트]

입력 2026-09-30 05:48
이 기사는 09월 30일 05:48 마켓인사이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대한민국 기업들은 전 세계가 주목하는 성장의 역사를 써왔다. 특유의 ‘빨리빨리’ 문화와 오너 경영의 과감한 결단력은 자본도 기술도 부족했던 시절 우리 경제를 일으킨 중요한 동력이었다. 그러나 비즈니스의 복잡성이 높아지고 불확실성이 상수가 된 2026년 현재, 과거의 성공 방정식만으로 미래의 성장을 담보하기는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특히 기업의 두뇌 역할을 해야 할 FP&A(재무기획 및 분석) 영역도 이러한 변화에서 자유롭지 않다. 필자가 국내 기업의 재무·기획 현장에서 접한 사례들을 보면, 글로벌 선도 기업이 지향하는 전략적 FP&A와 기존의 관리·통제 중심 재무 기능 사이에는 여전히 적지 않은 간극이 존재한다.

지난 연재를 통해 필자는 전략적 예산 배분, 데이터 기반 예측, 그리고 리더십에 이르기까지 FP&A의 핵심 요소를 짚어왔다. 이제 우리의 시선을 내부로 돌려, 한국 기업 경영 현장에서 관찰되는 과제를 진단하고 고도화를 위한 세 가지 방향을 제언하고자 한다. '회계 중심' 사고에서 '전략적 가치' 중심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하라국내 기업의 재무 조직은 전통적으로 세무 신고와 외부 감사, 결산 등 정확한 과거 기록과 통제 업무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 왔다. 이러한 기능은 기업 경영의 기본이자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영역이다.

다만 일부 기업에서는 기획팀이나 재무팀이 수행하는 FP&A 업무 역시 연말 결산 숫자를 바탕으로 다음 해 예산을 수립하고 비용을 관리하는 역할에 상대적으로 많은 자원을 투입하고 있다. 숫자를 과거의 성과를 기록하고 통제하는 수단을 넘어 미래의 자원 배분과 가치 창출을 위한 전략적 도구로 활용하는 데에는 아직 발전의 여지가 있다.

진정한 FP&A는 ‘지나간 숫자’를 설명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다가올 기회와 위험’을 관리하는 조직이어야 한다. 단순히 장부상의 이익을 집계하는 것을 넘어 자본비용(WACC)을 상회하는 수익을 창출하고 있는지 검토하고, 투하자본수익률(ROIC)과 경제적 가치의 관점에서 사업 포트폴리오와 투자 우선순위를 점검하는 ‘가치창출조직(Value Center)’으로 발전해야 한다.

재무 조직이 경영진의 의사결정을 사후적으로 설명하는 역할에 머무르지 않고, 투명한 데이터와 시나리오 분석을 바탕으로 전략의 타당성을 사전에 검증하는 건설적인 ‘Check & Balance’ 기능을 수행할 때 기업의 의사결정 수준 역시 한 단계 높아질 수 있다.

이러한 전환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1980~90년대 코카콜라다. 로베르토 고이주에타 회장 시절 코카콜라는 자본비용을 넘어서는 수익을 창출해야 실질적인 기업가치가 만들어진다는 원칙을 경영에 적극 반영했다. 특히 1987년에는 스턴스튜어트가 발전시킨 EVA(Economic Value Added·경제적 부가가치)를 전사적인 성과관리 지표로 도입해, 단순한 회계이익보다 투입된 자본의 비용까지 고려한 가치 창출에 초점을 맞췄다.

이후 EVA는 코카콜라뿐 아니라 여러 글로벌 기업에서 기업가치와 자본 배분을 바라보는 하나의 경영 도구로 활용됐다. 중요한 것은 특정 지표 자체가 아니다. 장부상의 이익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대신, 그 이익을 만들어내기 위해 투입된 자본의 기회비용까지 질문하는 것. 이것이 ‘회계 중심’의 재무와 ‘가치 중심’ FP&A를 구분하는 중요한 차이다. 오너의 '직관'과 데이터 기반의 '논리'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아라한국 기업 특유의 오너 경영은 신속한 의사결정과 장기적 관점의 과감한 투자라는 장점을 갖고 있다. 실제로 불확실성이 높은 환경에서는 데이터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경영자의 경험과 통찰력이 중요한 경쟁력이 되기도 한다.

문제는 직관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객관적으로 검증할 장치가 부족할 때 발생한다. 일부 기업에서는 정교한 분석보다 최고 의사결정권자의 판단이 우선되면서 FP&A가 의사결정을 검증하는 역할보다 이미 정해진 방향을 뒷받침하는 역할에 머무르는 경우도 종종 있다.

고도화된 K-경영을 위해서는 직관과 논리가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으로 작동해야 한다. 경영자의 통찰력은 존중하되, 그 판단이 가져올 재무적 리스크와 시나리오별 손익, 자본 효율성을 가감 없이 테이블 위에 올리는 것이 FP&A의 책무다.

이를 위해서는 필자가 앞서 강조한 ‘심리적 안전감’이 담보된 소통 문화도 중요하다. 데이터에 근거한 반론이 개인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의사결정을 위한 검증 과정으로 받아들여질 때, 기업은 과도한 낙관이나 확증편향으로 인한 가치 훼손(Value Destruction)의 위험을 줄일 수 있다.

직관과 데이터의 관계를 생각하게 만드는 대표적인 사례가 2002년 미국 프로야구 오클랜드 애슬레틱스다. 핵심 선수들이 팀을 떠난 상황에서 단장 빌리 빈은 기존 스카우팅에서 상대적으로 저평가되던 출루율 등 객관적 지표를 선수 선발과 팀 구성에 적극 활용했다.

그 결과 오클랜드는 당시 뉴욕 양키스의 약 3분의 1 수준인 약 4,000만 달러의 개막일 선수단 급여로 정규시즌 103승을 기록했고, 그 과정에서 아메리칸리그 기록이었던 20연승을 달성했다.

영화와 책 『머니볼』로 널리 알려진 이 사례를 기업 경영의 관점에서 읽는다면 교훈은 단순히 ‘데이터가 직관을 이긴다’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기존의 경험과 관행만으로 판단하던 영역에 객관적인 데이터를 새로운 검증 수단으로 도입함으로써 의사결정의 질을 높였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오너의 ‘촉’과 FP&A의 숫자가 서로 다른 언어로 충돌하게 두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의사결정 테이블에서 서로의 가정을 검증하도록 만드는 것. 이것이 데이터 기반 경영이 지향해야 할 모습이다. 파편화된 데이터 인프라를 통합하고 전문 인력을 양성하라FP&A가 전략적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좋은 분석 방법론만큼이나 이를 뒷받침하는 데이터와 인력이 중요하다. 그러나 국내 기업 현장에서는 여전히 여러 시스템에서 데이터를 내려받아 엑셀로 취합하고, 부서마다 서로 다른 기준으로 숫자를 관리하는 업무 방식이 남아 있다.

이처럼 데이터가 부서와 시스템별로 단절된 ‘칸막이(Silo)’ 현상은 분석의 속도를 늦출 뿐 아니라 동일한 숫자를 놓고도 서로 다른 결과가 나오는 문제를 만든다. FP&A 인력이 데이터를 해석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데 시간을 쓰기보다 데이터를 수집하고 정합성을 맞추는 데 상당한 시간을 사용한다면 전략적 파트너로서의 역할에는 한계가 생길 수밖에 없다.

인재 문제도 마찬가지다. FP&A에는 회계와 재무에 대한 기본 지식뿐 아니라 비즈니스 모델에 대한 이해, 전략적 사고, 데이터 분석 역량, 그리고 경영진과 소통하는 능력이 동시에 요구된다. 이러한 역량은 단기간의 순환 보직만으로 축적하기 어렵다.

따라서 기업은 전사적 데이터 통합과 SSOT(Single Source of Truth) 구축에 투자하는 동시에, 재무와 사업을 함께 이해하는 FP&A 전문가가 성장할 수 있는 중장기 커리어 패스를 설계해야 한다. 시스템에 대한 투자와 사람에 대한 투자는 별개의 과제가 아니라 FP&A 고도화를 위한 두 축이다.

전문성을 확보하는 방식에 새로운 시각을 보여준 사례가 넷플릭스다. 넷플릭스는 2006년 자사의 영화 추천 알고리즘 ‘Cinematch’의 예측 정확도를 10% 이상 개선하는 팀에 100만 달러의 상금을 지급하는 ‘Netflix Prize’를 시작했다. 이를 위해 약 1억 건의 익명화된 영화 평점 데이터를 공개하고 전 세계 연구자와 데이터 과학자들이 문제 해결에 참여하도록 했다.

대회에는 186개국에서 수만 명의 참가자가 도전했고 경쟁은 약 3년에 걸쳐 이어졌다. 2009년 최종 단계에서는 BellKor’s Pragmatic Chaos와 경쟁팀이 사실상 동일한 수준의 성능을 기록했으며, 규정에 따라 먼저 결과를 제출한 BellKor’s Pragmatic Chaos가 최종 우승자가 됐다.

이 사례의 의미는 단순히 더 좋은 추천 알고리즘 하나를 얻었다는 데 있지 않다. 기업 내부에 존재하지 않는 전문성을 외부의 집단지성과 연결하고, 데이터를 문제 해결의 핵심 자산으로 활용했다는 점에 있다.

모든 기업이 넷플릭스처럼 데이터를 외부에 공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필요한 역량을 반드시 기존 조직 안에서만 찾아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내부 육성, 외부 채용, 전문 파트너와의 협업 등 다양한 방식으로 필요한 전문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은 FP&A 조직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관행을 넘어 글로벌 스탠다드로이제는 우리가 자부해온 과거의 성공 방정식이 오히려 내일의 성장을 가로막는 ‘성공의 함정’이 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필자가 제안하는 ‘성찰의 지표’들이 귀사의 FP&A 성숙도를 다시 점검하는 작은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한국 기업이 직면한 이러한 과제들은 하루아침에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모든 한국 기업을 하나의 모습으로 일반화할 수도 없다. 이미 일부 선도 기업들은 데이터 통합과 전략적 FP&A, 가치 중심의 자본 배분 체계를 빠르게 구축하고 있다.

그럼에도 저성장 기조와 글로벌 경쟁의 격화 속에서 과거의 관행만으로 경영하는 방식은 지속 가능성이 낮아지고 있다. 숫자로 소통하고, 데이터로 미래를 그리며, 가치 중심의 의사결정을 지원하는 FP&A 역량은 이제 기업 경쟁력을 좌우하는 중요한 경영 인프라가 되고 있다.

한국 기업 특유의 빠른 실행력과 과감한 의사결정에 정교한 FP&A의 항법 기술이 결합한다면 그 강점은 더욱 커질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한국적 경영의 장점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장점을 데이터와 재무적 논리로 보완해 더 높은 수준의 의사결정 체계로 발전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를 더욱 빠르게 만들 동력은 기술의 진보다. 인공지능(AI)과 클라우드가 주도하는 변화는 FP&A가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하며 미래를 예측하는 방식 자체를 바꾸고 있다.

다음 편에서는 기술 혁명이 재무 조직의 업무 방식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있는지, <디지털 전환 시대의 FP&A: AI와 데이터가 만드는 재무의 미래>를 주제로 디지털 혁신이 가져올 새로운 경영 지평을 살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