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년간 이끌던 브랜드를 떠난 한 디자이너는 운하의 도시로 향했다. 변화무쌍한 패션계에서 흔들리지 않고 한 편의 시(詩) 같은 옷을 지어온 드리스 반 노튼의 이야기다. 그가 베네치아에서 써 내려간 첫 번째 이야기를 기록한 책이 나왔다.
이탈리아 베네치아에 문을 연 드리스 반 노튼 재단은 장밋 빛 파사드가 매력적인 팔라초 피사니 모레타에 둥지를 틀었다. 한 사람이 통과하기에도 비좁은 골목길을 굽이굽이 지나야 닿는 이곳은 과거 나폴레옹의 황후 조제핀과 합스부르크가의 황제 요제프 2세 등 유력 인사들이 드나들던 사교 무대였다. 바로 이 역사적 공간에서 드리스 반 노튼 재단의 첫 행보가 시작됐다.
드리스 반 노튼은 현대 패션계의 대량생산 흐름에 휩쓸리지 않고 장인 정신과 수공예의 가치를 고수해온 대표적 디자이너로 꼽힌다. 정교한 수공예 디테일을 고집해온 그는 인도의 전통 자수 장인들과 30년 넘게 협업했을 만큼 손으로 만드는 행위의 가치를 각별히 여겼다.
그런 그가 지난 4월 베네치아 비엔날레 기간에 맞춰 재단의 첫 프레젠테이션 ‘The Only True Protest is Beauty’를 선보였다. 손으로 빚어낸 아름다운 작품과 그 과정에 담긴 ‘만드는 행위’의 의미까지 한자리에 담아낸 전시였다. 패션과 공예, 가구, 유리, 도자, 현대미술 등 서로 다른 영역에서 활동하는 전 세계 창작자들의 작품 200여 점이 팔라초 피사니 모레타 세 개 층, 스무 개의 공간에 펼쳐졌다.
재단은 10월 4일 막을 내리는 이 여정을 책에 기록해 오래도록 남기기로 했다. 책 디자인은 드리스 반 노튼 재단의 비주얼 아이덴티티와 첫 프레젠테이션을 맡았던 세바스티아노 지라르디 스튜디오(Sebastiano Girardi Studio)가 담당했다. 전시를 그대로 옮기는 것을 넘어 한층 더 확장된 동시대 공예를 탐구한다. 세 편의 에세이와 방대한 시각 자료, 작품과 작가, 제작 과정에 대한 심층적인 이야기를 엮었다.
오트 쿠튀르의 거장 크리스티앙 라크루아(Christian Lacroix), 아방가르드 패션의 전설 꼼데가르송의 레이 가와쿠보(Rei Kawakubo)부터 거친 물성으로 존재를 탐구하는 조각가 피터 부겐하우트(Peter Buggenhout), 컬렉터블 아티스트 미샤 칸(Misha Kahn), 유리공예가 미시마 리쓰에(Ritsue Mishima), 자연 생태를 예술로 승화시키는 위베르 뒤프라(Hubert Duprat)까지. 전시를 이끈 주역들의 창작 세계를 따라가며 재료와 손길, 시간으로 이뤄낸 결과물을 만나게 된다.
팔라초 피사니 모레타 자체도 책의 일부가 된다. 저택 내부에는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의 천장화를 비롯해 당대 화가들이 그려 넣은 벽화가 우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빼어난 건축미로 한때 베네치아 유력 인사들의 발길이 이어지던 이곳은 건축과 장식, 여러 시대가 겹겹이 쌓인 역사를 통해 책의 또 다른 서사를 구성한다. 책에는 재단의 다음 단계를 위한 복원 공사가 시작되기 전 팔라초의 모습이 담겼다. 변화를 앞둔 팔라초의 한순간을 기록으로 남긴 셈이다.
강은영 기자 qboo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