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이 사실상 봉쇄한 호르무즈 해협을 선박자동식별장치(AIS)를 끈 채 몰래 통과하는 이른바 ‘다크 탱커’가 급증하면서 중동산 원유 공급이 빠르게 회복되고 있다. 미국과 이란의 군사 충돌 이후 급감했던 호르무즈 해협 원유 통과량은 충돌 전의 60% 수준까지 올라왔다. 전쟁 장기화에도 국제유가가 사상 최고 수준까지 치솟지 않는 배경으로 지목된다.
28일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9월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한 것으로 추정되는 원유는 하루 936만배럴로 집계됐다. 8월보다 356만배럴 증가한 규모다. 2월 말 미국과 이란의 군사 충돌 이후 가장 많은 양으로, 충돌 전 하루 약 1500만배럴의 60% 수준까지 회복했다.
호르무즈 해협은 전 세계 석유 공급의 약 20%가 통과하는 핵심 해상 수송로다. 군사 충돌 이후 이란이 사실상 해협을 봉쇄한 데 이어 7월부터는 홍해 쪽에서도 친이란 무장조직의 유조선 공격이 잇따랐다. 9월 초에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송유관까지 공격받아 가동이 중단됐고 유럽행 원유 출하도 취소됐다.
그럼에도 국제유가는 예상보다 안정적인 흐름을 보이고 있다. 서부텍사스산원유(WTI) 선물은 지난 25일 배럴당 91~95달러 수준에서 거래됐다. 군사 충돌 이후 고점인 119달러대보다 약 20% 낮고, 2008년 기록한 사상 최고치 147달러대에도 크게 못 미친다.
시장에서는 AIS를 끈 채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는 다크 탱커가 원유 공급을 떠받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국제항로를 운항하는 유조선은 원칙적으로 AIS를 켜고 위치정보를 발신해야 하지만, 안전 위협이 있는 경우 긴급조치로 신호를 끌 수 있다. AIS를 끄면 이란 측이 선박의 위치를 파악하기 어려워져 드론 공격이나 나포 위험을 낮출 수 있다.
유럽 조사기관 케플러는 AIS를 끄고 해협을 빠져나간 뒤 페르시아만 밖에서 아시아행 유조선으로 원유를 옮겨 싣는 해상 환적이 크게 늘고 있다고 분석했다. 도리가타 유이 케플러 수석 시장 애널리스트는 “이 같은 환적이 중동산 원유 공급을 지탱하고 있다”고 말했다.
통항 확대를 주도하는 국가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라크다. 사우디는 충돌 직후 홍해를 통한 우회 수출을 늘렸지만 최근 다시 호르무즈 해협을 활용한 수출을 확대하고 있다. 사우디아람코는 9~11월 오만 앞바다에서 해상 환적을 거친 원유의 스팟 거래 입찰도 시작했다. 사우디가 원유를 장기계약과 공식판매가격 중심으로 판매해왔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례적이다.
이라크는 상황이 더 절박하다. 충돌 전 원유 수출의 90% 이상을 호르무즈 해협에 의존했던 이라크의 원유 생산량은 5월 기준 2월보다 60%, 하루 260만배럴 줄었다. 시리아와 튀르키예를 경유하는 송유관 건설을 추진하고 있지만 당장은 호르무즈 해협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 최근에는 자국 연안까지 원유를 받으러 오는 구매자에게 배럴당 20~30달러씩 할인해 판매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다크 탱커 확대는 운송비 급등이라는 부작용도 낳고 있다. 중동과 극동을 오가는 초대형 원유운반선(VLCC)의 하루 용선료는 24일 기준 123만달러로 2월 말보다 5.7배 상승했다. 복잡한 해상 환적과 우회 운항이 늘어난 영향이다.
유가 전망도 여전히 높은 수준에 머물고 있다. HSBC는 9월 초 브렌트유 평균 가격 전망을 올해 4분기 배럴당 95달러, 2027년 85달러로 종전보다 20~25달러 상향 조정했다. 호르무즈 해협의 불안정이 장기화하면서 전쟁 이전의 저비용 수송 체계로 돌아가기 어려울 수 있다는 판단이다.
호르무즈 해협의 ‘은밀한 통항’이 당장의 공급 쇼크를 완화하고 있지만, 높은 운임과 할인 판매, 복잡한 환적 구조가 고착화될 경우 중동산 원유의 공급 비용 자체가 구조적으로 높아질 수 있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도쿄=최만수 특파원 bebo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