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조업 데이터 디지털화가 AX 출발점"

입력 2026-09-27 17:05
수정 2026-09-28 00:39

올해로 창립 50년을 맞은 에쓰오일은 인공지능(AI) 전환을 준비하면서 고민에 빠졌다. 반세기 동안 축적된 엔지니어링 도면과 문서가 상당하지만, 작성 시기마다 설비 기호와 명칭이 각기 다른데다 손으로 작성한 종이 문서들도 적지 않았다. 이대로는 AI가 이 데이터들의 의미와 맥락을 읽어낼 수가 없다는 의미였다.

수년에 걸쳐 에쓰오일은 흩어져 있던 방대한 데이터들을 한 데 모아 기호와 명명 규칙을 통일하고 디지털화했다. 현재 에쓰오일 내 디지털 플랫폼에는 50년 동안 쌓인 약 67만 건의 문서와 120만 건의 관련 태그가 등록돼 있다. AI가 반세기에 걸친 데이터 맥락을 읽으며 고장 가능성과 교체 필요성을 계산하고, 나아가 더 나은 공정 등을 제시할 수 있는 ‘AI 레디’ 상태로 탈바꿈 한 것이다.

에쓰오일의 디지털 전환 과정에서 관련 소프트웨어를 제공한 옥타브 인텔리전스의 박호정 프로젝트 매니저는 “화학·정유 기업들의 고민인 설비 고장이나 가스 누출, 산소 부족 등 안전사고 가능성을 획기적으로 낮출 데이터 기반이 마련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데이터 구축이 AX ‘첫 걸음’최근 AI 전환(AX)을 추진하면서 기존 데이터 활용 방안을 고민하는 제조 기업들이 많다. 수십 년 업력을 이어오면서 데이터를 쌓았지만 이 데이터들의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 이를 어떻게 AI와 연결할 수 있을지 막연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산업용 AI 소프트웨어 기업인 옥타브가 지난 17~18일 싱가포르에서 연 ‘옥타브 라이브 온 투어’ 행사에서는 에쓰오일, 티에스아이, 페트로나스, 치요다 등 국내외 기업들이 공장 데이터를 AX를 위한 자산으로 바꾼 과정이 소개됐다. AX를 먼저 고민한 기업들이 주목한 것은 자사의 데이터였다. 흩어진 데이터를 연결하고 디지털화하는 작업이 AX의 출발점이라는 얘기다. 이번 행사를 개최한 옥타브는 건설, 플랜트, 에너지, 인프라 등 산업에 소프트웨어 플랫폼을 제공하는 기업으로, 해당 산업들에 대한 전문 지식이 강점이다.

이번 행사에선 국내 2차전지 장비사 티에스아이도 발표에 나섰다. 디지털 전환을 고민하던 티에스아이는 우선 외부 업체로 흩어진 데이터를 내재화하는 작업부터 시작했다. 과거엔 각기 다른 외주 업체에 데이터를 제공하고 최종 설계 도면만 납품 받았다. 문제는 이처럼 자신들이 보유한 데이터의 해석과 활용을 외주화하는 방식으로는 AX를 위한 첫 발도 떼기 어려웠다는 점이다.

이에 티에스아이는 전문 인력을 충원해 설계 기능을 내재화한 뒤 미국·유럽 8개 배터리 공장에 납품한 장비 설계 데이터를 디지털화했다. 그 결과 해외 장비를 수리·정비할 때도 외주업체를 찾아 현지로 떠나야 했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한국 본사에서 3D 시뮬레이션으로 대부분의 과정을 해결할 수 있게 됐다. ◇“도메인 지식+AI’=산업 진화이번 행사에 참석한 전문가들은 무턱대고 AI 모델만 먼저 도입하는 방식으론 오히려 역효과를 부를 수 있다고 조언했다. 기업 AX 토론자로 나선 로버트 패킷 쿠팡 풀필먼트 선임 이사(운영 효율성 담당)는 “데이터 기반을 만드는 단계를 건너 뛰고 도입한 AI는 사업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며 “모든 요소의 데이터를 한 곳으로 모아 표준화하는 작업이 AI 도입 이전에 선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어떤 AI 모델이 좋은지 고민하는 것보다 AI가 사업의 맥락을 데이터를 통해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게 먼저라는 의미다.

마티아스 스텐버그 옥타브 최고경영자(CEO)는 행사 기조연설에서 “(디지털 경험이 부족한)제조 기업들의 경우 오랫동안 쌓아온 경험과 데이터가 각 사업부별로 단절된 채 방치되기 쉽다”며 “제조 기업의 강점인 ‘도메인 지식’(전문 지식)을 통합해 데이터화하면, AI는 이를 상상하기 어려운 속도와 규모로 활용하며 제조 산업을 완전히 바꿀 것”이라고 전망했다.

싱가포르=박한신 기자 p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