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벌어진 12·29 무안공항 여객기 참사의 희생자 대부분은 한국인이고 사고 발생 장소 역시 한국이다. 하지만 일부 유가족들은 미국에서 손해배상 소송을 진행 중이다. 사고기 제조사인 보잉이 미국 기업인 데다 항공기 설계·제조와 인증에 관한 핵심 자료가 미국에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벌어진 사건을 두고 미국 법원의 문을 두드리는 사례는 무안공항 참사뿐만이 아니다. 국내 기업 간 분쟁부터 익명 유튜버 신원을 찾기 위한 소송까지 미국 기업이나 플랫폼이 사건의 핵심 고리로 얽혀 있으면 미국 법원이 등장한다. 법조계에선 국내보다 폭넓은 증거개시(디스커버리) 제도를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을 주된 이유로 꼽는다. ◇한국과 증거 확보 절차 등 차이27일 법조계에 따르면 무안공항 여객기 참사의 유가족들은 이달 초 미국 워싱턴주 서부연방법원에 보잉을 상대로 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 소장을 제출했다.
유가족 측이 미국 법원에 소송을 제기한 가장 큰 이유는 강력한 증거개시 제도다. 사고기인 B737-800의 설계와 전기·유압·엔진 제어계통, 인증·시험 등에 관한 자료를 확보해 기체 결함 여부를 검증하겠다는 것이다. 소장에 따르면 현재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관련 부품 제조·유통업체도 증거개시를 통해 특정한 뒤 추가 피고로 포함할 수 있다는 게 유가족 측 입장이다. 국내에도 법원의 문서제출명령 제도가 있지만 미국의 증거개시와 비교하면 자료 확보 수단과 불응 시 제재 등에 차이가 있다. 국내 대리인인 임치영 법무법인 씨앤와이 변호사는 “미국에서는 허위 진술을 하거나 자료 제출 의무를 위반했을 때 소송상 불이익이 크다”며 “증거개시가 실체적 진실을 규명하는 데 중요한 수단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미국의 손해배상 체계도 미국 법원을 택한 이유 중 하나다. 한국 법원은 사망 사고 위자료 산정에 일정한 기준을 적용하는 반면 미국에서는 정신적 고통 등 비경제적 손해를 배심원이 개별 피해와 증거를 토대로 판단한다. 유가족 측은 이번 소장에서도 배심재판을 요구했다. 임 변호사는 “한국에서 사망 사고에 대한 위자료 산정 기준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는 점도 이번 소송에서 중요하게 보고 있다”고 말했다.
다만 미국에서 소송을 제기했다고 모든 재판이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보잉은 지난 11일 법원에 “한국에서 재판하는 것이 적절하다”며 ‘불편한 법정지’(Forum Non Conveniens·FNC) 신청을 냈다. FNC는 법원이 사건을 심리할 권한이 있더라도 사고 장소와 증인·증거의 소재, 당사자 편의 등을 고려해 다른 국가의 법원이 더 적절한 재판지라고 판단하면 소송을 각하할 수 있도록 하는 원칙이다. 유가족 측은 사고기 설계·제조와 관련한 핵심 증거가 미국에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임 변호사는 “이번 소송은 미국 기업인 보잉의 항공기 설계와 안전 운항 지침, 조립 상태 등을 따지는 사건”이라며 “관련 증거 상당수가 미국에 있고 보잉 역시 관련 자료를 보유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양측은 다음 달 23일까지 관련 서면 제출을 마칠 계획이다. ◇자료 받으러 미국행 택하기도국내에서 증거개시 제도가 주목받은 대표적 계기는 2019년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의 소송이다. LG화학은 SK이노베이션이 자사 배터리 인력을 대거 채용하는 과정에서 영업비밀을 부당하게 취득·사용했다며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에 제소했다. 미국 델라웨어 연방법원에도 영업비밀 침해 소송을 냈다. 증거개시 제도를 이용해 상대 기업 내부 이메일과 전산 자료 등을 확보할 수 있는 데다 ITC에서 승소하면 미국 수입금지 조치까지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ITC 증거개시 과정에서 SK이노베이션의 증거 삭제 문제가 불거졌다. 결국 SK 측이 LG에 2조원을 지급하는 조건으로 분쟁을 종결했다.
미국에서 제기된 소송이 FNC를 이유로 각하된 사례도 있다. 넥슨코리아는 2023년 게임사 아이언메이스와 전직 직원들을 상대로 게임 ‘다크앤다커’가 넥슨의 저작권과 영업비밀을 침해했다며 미국 워싱턴주 서부연방법원에 소송을 냈다. 다크앤다커가 미국 밸브의 게임 유통 플랫폼 스팀을 통해 서비스됐다는 이유에서다.
아이언메이스는 이에 맞서 FNC를 신청했고 미국 법원이 이를 받아들였다. 법원은 당사자들이 한국 기업 또는 한국 거주자인 데다 증인과 증거 대부분이 한국에 있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대법원은 올해 4월 아이언메이스가 넥슨의 영업비밀을 침해했다며 57억원을 배상하도록 한 2심 판결을 확정했다.
국내 소송에 필요한 정보를 확보하기 위해 미국 법원을 활용하기도 한다. 아이브 멤버 장원영과 유튜브 채널 ‘탈덕수용소’ 사건이 대표적이다. 소속사인 스타쉽엔터테인먼트는 악성 루머를 올리던 탈덕수용소 운영자의 신원을 알 수 없어 국내 소송에 어려움을 겪었다. 유튜브 계정 정보를 가진 곳은 미국 구글 본사였다.
스타쉽은 2023년 캘리포니아 북부연방법원에 외국 소송을 위한 증거개시를 신청했다. 법원이 신청을 받아들여 스타쉽은 탈덕수용소 운영자의 이름과 주소 등을 확보했다. 운영자의 신원이 드러나면서 국내 민·형사 절차도 본격화했다. 장원영이 운영자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선 5000만원 배상 판결이 확정됐다. 운영자는 명예훼손, 모욕 등 혐의로 기소돼 올해 1월 대법원에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확정받았다.
김유진/이승우 기자
■ 디스커버리 제도
영미권에서 재판의 변론절차 진행 전 양 당사자가 사건과 관련된 정보를 교환하는 제도. 소송 당사자에게 증거를 취득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해 자율적으로 광범위한 자료 수집이 가능하다. 증거 수집에 협조하지 않는 경우 법원은 각종 제재를 부과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