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무즈 해협 파병을 둘러싼 정부의 고심이 깊어지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전쟁에 관여하거나 개입하는 파병은 없다”며 선을 그었지만 상선과 원유 수송로, 국민의 생명과 안전 등 국익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역할은 열어뒀다. 공병, 의료 등 비전투병 파병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이지만, 그런 경우에도 부담은 작지 않다.
파병 결정 시 이란과 관련 세력의 반발에 더해 한국 상선에 대한 공격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반대로 파병하지 않으면 한미 동맹의 균열, 미국 시장 진입 규제와 같은 부담이 남는다. 이래도 문제, 저래도 문제다. 이에 따른 후폭풍은 기업에도 고스란히 몰아칠 가능성이 크다. 기업안보 시대, 지정학 취약성부터 진단해야
그동안 미중 갈등과 공급망 분절은 관세 및 투자, 안보물자 규제의 문제로 다가왔다. 기업은 미국에 투자하면서도 중국 사업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안보의 선택은 다르다. 국가가 어느 편에 설지 답하는 순간, 경제와 기업도 그 선택의 비용을 치르게 된다.
노무현 정부의 이라크 파병과도 다르다. 당시에도 어려운 정치적 결정이었지만, 군사적 선택이 기업의 일상적 거래를 지금처럼 곧바로 흔들지는 않았다. 오늘의 분쟁은 군사와 경제의 경계가 희미하다. 군사행동 뒤에는 제재가 붙고, 제재는 금융 제한과 수출통제로 번진다. 기술과 에너지, 물류까지 흔든다. 안보가 경제를 압도하며 상거래 질서를 한순간에 바꿔버릴 수 있다.
기업이 물건만 잘 만들어 잘 팔면 그만이던 시절은 저물었다. 이젠 ‘기업 외교’에 이어 ‘기업 안보’까지 염두에 두고 전략을 짜야 한다. 정부는 경우에 따라선 안보를 위해 경제적 손실을 감수할 수 있다. 반면 기업은 손실을 줄이고 사업을 이어가야 한다. ‘국가 안보’와 ‘기업 안보’의 언밸런싱 문제가 기업 경영에 새로운 이슈로 떠올랐다. 그러니 기업의 첫 질문부터 달라져야 한다. 일단 자가진단이 우선이다. 모든 기업의 위험이 같지도 않다. 특정 국가의 시장과 기술, 금융망에 깊이 의존하면 정치적 선택에 취약하다. 반대로 양쪽 모두가 필요로 하는 자원이나 기술, 대체하기 어려운 제품을 보유한 기업은 일정한 협상력을 가질 수 있다. 경제적 힘과 정치적 취약성이 반드시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자기평가는 냉정해야 한다. 매출은 어느 국가에 묶여 있는가. 핵심 기술과 부품은 대체 가능한가. 결제와 물류망은 우회할 수 있는가. 상대국은 우리 제품을 얼마나 쉽게 대체할 수 있는가. 그리고 우리 회사의 국적은 현지에서 얼마나 정치적으로 읽히는가. 이 질문에 답해야 대응 강도를 정할 수 있다. 시나리오를 행동 매뉴얼로…CEO가 나서야노출이 큰 기업에는 작은 ‘지정학 상황실’이 필요하다. 별도 조직을 새로 구성하기보다 대외협력, 법무, 전략, 구매, 재무가 같은 상황을 놓고 판단하는 체계를 마련하자는 것이다. 정부 발언, 제재 법안, 수출통제, 항로 이상을 모니터링하고 경보 기준을 정해야 한다.
그다음은 시나리오다. ‘미중 갈등’, ‘중동 위기’처럼 크게 묶을 것이 아니라 실제 의사결정 단위로 쪼개야 한다. 특정 품목의 수출통제가 확대될 때, 금융제재가 거래은행으로 번질 때, 호르무즈 운항 차질이 장기화할 때를 가정한다. 그리고 매출, 생산, 자금, 공급망, 정부 관계에 어떤 변화가 생기는지 구체적으로 계산한다.
여기서 멈추면 또 하나의 보고서만 양산할 뿐이다. 전망을 행동으로 바꿔야 한다.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맞히는 데 집중할 게 아니라 ‘어떤 일이 일어나면 무엇을 할 것인가’를 규정해야 한다. 어느 단계에서 신규 계약을 멈출지, 운임이 어느 수준을 넘으면 대체 항로를 쓸지, 핵심 부품 납기가 얼마나 늘어나면 두 번째 공급자를 가동할지를 미리 정해야 한다. 모니터링, 분석, 경보, 결정, 실행이 하나의 흐름이어야 한다.
대관도 원칙이 필요하다. 법적으로 가능하다는 것과 정치, 사회적으로 정당하다는 것은 다르다. 한 나라에서의 정부 접촉이 다른 나라에서는 정치적 편향이나 자국 정부의 대리행동으로 읽힐 수 있다.
좋은 최고경영자는 지정학 이슈를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니다. 우리 회사가 어디까지 정치와 거리를 둘 수 있는지 알고, 거리를 둘 수 없는 순간에는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포기할지 준비하는 사람이다. 어떤 상황이 와도 시나리오별 선택지를 꺼내 들 수 있는 ‘준비된 상황실장’이어야 한다. 앞으로의 기업 경쟁력은 예측의 정확도보다 준비된 결정의 속도에서 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