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리페놀팩토리는 26초당 1병씩 팔리고 있는 탈모 케어 특화 샴푸 ‘그래비티’를 개발한 스타트업이다. 작은 기업이지만, 창립자인 이해신 KAIST 화학과 석좌교수를 필두로 기능성 샴푸 시장을 선도하고 있다. 2024년 4월 첫 출시 이후 현재까지 누적 290만병, 480억원의 판매고를 올렸다. 최근 들어선 미국(아마존), 프랑스(쁘렝땅백화점), 일본(라쿠텐), 대만(모모홈쇼핑), 싱가포르(웰시아) 등 해외 시장에 공격적으로 진출하며 ‘K헤어케어’ 열풍에 제대로 올라탔다. 올해 상반기에만 15억원을 수출했다.
이 회사의 저력은 ‘35년 삼성맨’이 예산 관리를 책임지고 있다는 데서도 나온다. 최성식 폴리페놀팩토리 최고재무책임자(CFO) 겸 경영지원본부장(62·사진)은 1988년 삼성그룹 공채로 입사해 삼성생명 펀드매니저, 삼성자산운용 홍콩·베이징 법인장을 거친 인물이다. 정년퇴직 후 약 11개월이 지난 2024년 8월, 지인의 소개로 갓 사업을 시작한 폴리페놀팩토리에 합류했다. 그는 27일 한국경제신문 인터뷰에서 “일만 하며 살아오다 자유시간이 생기니 오히려 낯설었다. 일을 더 할 수 있다는 마음이 컸다”며 다시 출근길에 오른 이유를 밝혔다.
가장 먼저 한 일은 명함에 자신의 직책을 ‘인턴 CFO’라 적은 것이었다. 최 CFO는 “스타트업의 CFO는 대기업과 달리 재무뿐 아니라 인사, 노무, 법무, 주주 관리까지 업무 범위가 넓다”며 “경력이 오래되긴 했지만, 인턴처럼 처음부터 배운다는 마음가짐을 담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영화 ‘오디세이’와 박스오피스 1위를 다투고 있는 ‘인턴’ 속 주인공의 모습이 연상된다. 배우 최민식이 연기하는 기호는 출판사에서 37년을 일하다 패션 회사의 ‘실버 인턴’으로 입사하는 인물이다.
인턴을 자청한 1년간 최 CFO는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첫차를 타고 대전 KAIST에 있는 폴리페놀팩토리 본사로 출근했다. 스타트업에 미비하기 마련인 취업 규칙과 급여 체계, 이사회 운영 방식, 주주 관리, 계약 검토까지 하나하나 배워 나가며 시스템을 세웠다. 최 CFO는 “대기업 법인장을 지냈다 해서 스타트업의 인사·노무 시스템을 다 아는 건 아니다”라며 “모르는 건 누구에게든 물어봤다. 인턴 명함을 내세우니 젊은 직원들과도 격의 없이 소통할 수 있었다”고 했다. 30여 명 직원 대부분이 20~30대 과학자로 구성된 이 회사에선 최 CFO가 최고령이다.
그는 스스로를 ‘최반장’으로 칭한다. 직급이나 업무 영역을 따지지 않고, 담당자가 정해지지 않은 일을 도맡아 하겠다는 뜻을 담았다. 도어락 건전지를 교체하는 것 따위의 일을 서슴지 않는다. 입사 첫해 연말 할로윈 파티에선 애니메이션 캐릭터 ‘마이콜’ 분장을 하고 나타났다. 최 CFO는 “‘내 일이 아니다’라고 선을 긋기 시작하면 스타트업은 전체가 멈춘다”며 “필요한 일이라 생각되면 직접 하면 된다”고 했다.
삼성그룹 재직 시절 최 CFO는 사내에서 ‘헌터’(hunter·사냥꾼)로 불렸다. 본연의 해외 투자 업무 외에 기관투자자의 해외 투자 현황 등 대외 업무를 자청해 주말마다 특근하던 시절이었다. 옛날 코미디 프로그램 ‘고독한 사냥꾼’ 캐릭터와 닮았다며 상사가 붙여줬다. 수십 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삼성그룹 OB(퇴직자) 모임에서 그는 헌터로 통한다. 지금도 CFO 본연의 일에만 갇혀 있지 않고 미래 사업 발굴에 적극적으로 임한다. 최 CFO는 “CFO의 역할은 숫자에 담긴 의미를 찾아내 경영진의 판단을 돕는 것”이라며 “때로는 반갑지 않은 이야기도 해야 하니 고독한 사냥꾼이란 별명이 어느 정도 들어맞는 셈”이라고 했다.
최 CFO는 “‘인생 2막’이란 표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단지 60세를 넘겼다 해서 다른 인생이 시작되는 게 아니란 점에서다. “경험은 분명히 자산이지만, 과거의 성공 방식을 고집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순간 부채가 될 수도 있다”는 게 그의 신념이다. 경력이나 직급을 내세우지 않고 인턴을 자청하며 젊은 직원들과 눈높이를 맞춘 이유다. “나이가 든다고 늙는 게 아니라, 익숙한 것에만 집착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노화가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장서우 기자 suwu@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