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때부터 각종 피부 시술과 마사지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홈케어 디바이스 역시 늘 관심 있게 지켜보던 분야였다. 새로운 기기가 나오면 어떤 기술이 들어갔는지 궁금했고, 피부과에서 받던 관리를 집에서는 어디까지 구현할 수 있을지도 늘 흥미로웠다.
얼마 전 랑콤 매장에서 꽤 재미있는 경험을 했다. 작은 테이프 스트립으로 볼의 각질을 채취해 완충액과 카트리지를 거쳐 기기에 넣으면 그 자리에서 피부 상태를 분석해 피부 나이를 보여주는 ‘셀 바이오프린트(Cell BioPrint)’라는 서비스였다. 코로나 진단키트를 연상시키는 방식도 재미있었지만, 카메라로 피부 표면을 들여다보는 수준을 넘어 내 피부에서 직접 채취한 샘플의 단백질을 분석한다는 것이 무엇보다 신기했다.
“그래, 이거지!” 나도 모르게 지금까지 백화점 1층 화장품 매장에서 받아본 서비스 중 가장 재미있다며 연신 감탄했다. 14년 전 아베다에서 근무할 당시에도 고배율 카메라로 두피를 확대해 상태를 보여주는 서비스가 있었는데, 그 후 10여년동안 오프라인 매장에서의 피부 진단 방식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드디어 리테일 서비스에도 새로운 기술이 들어오기 시작하는구나 싶어 더 반가웠다.
최근 다이슨이 공개한 칫솔 신제품도 신선했다. 칫솔 안에 달린 10만 화소 카메라가 초당 28장의 이미지를 분석하고 AI 머신러닝 알고리즘으로 치아 사이의 틈을 찾아낸다. 그리고 그 위치에 맞춰 세정액을 분사한다. 칫솔이 내 입안을 ‘보면서’ 양치하는 셈이다. 다이슨은 이 제품을 위해 47만 장의 치아 이미지를 학습시켰다고 한다.
피부에서는 내 각질을 채취해 노화 상태를 분석하고, 입안에서는 칫솔이 카메라와 AI로 치아를 들여다본다. 기기가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무언가를 가하는 단계를 넘어, 이제는 내 몸을 먼저 읽고 그 결과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내 화장대의 풍경도 달라졌다. 한때 화장대의 주인공은 단연 화장품이었다. 새로운 성분이 등장할 때마다 전성분표를 들여다보고, 비싼 크림과 세럼을 아껴 발랐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화장품 사이로 충전해야 하는 물건들이 하나 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고주파(RF), 미세전류, EMS, LED, LDM 초음파. 피부과나 전문 관리실에서 듣던 기술들이 손바닥만 한 기기 안으로 들어왔다. 요즘은 세안을 마치고 무엇을 바를지보다 오늘은 어떤 기기를 쓸까부터 생각할 때도 있다. 뷰티 디바이스의 대중화를 만든 메디큐브한국에서 홈 뷰티 디바이스를 가장 대중적인 영역으로 끌어내린 사례는 메디큐브 AGE-R일 것이다. 이전에도 홈 뷰티 기기는 많았지만 대체로 가격이 높거나, 고관여자들이 사용하는 영역에 가까웠다. 메디큐브는 접근 가능한 가격대의 기기를 ‘모공’, ‘광채’, ‘탄력’처럼 피부 고민과 연결했다. 여기에 자사 앰플과 크림을 함께 사용하도록 제안하면서 미용기기를 특별한 날 꺼내 쓰는 전자제품이 아니라 화장품과 함께 사용하는 스킨케어 루틴의 일부로 만들었다.
나는 메디큐브의 가장 큰 성과가 새로운 기술 하나를 발명했다는 데 있다기보다, 미용기기의 진입장벽을 낮추고 ‘기계로 피부를 관리한다’는 행동 자체를 대중화했다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제는 그마저 너무 익숙해져 조금 식상하게까지 느껴지려던 차, 최근 APR은 AGE-R 부스터 프로의 기술을 활용한 탈모 연구 결과를 국제 학술지 《Pharmaceutics》에 발표했다. 연구진은 기기의 ‘에어샷’ 모드에 적용된 RF 마이크로포레이션 기술을 이용했다. 고주파 에너지로 각질층에 일시적인 미세 통로를 만든 뒤 바르는 탈모 치료 성분인 미녹시딜을 적용해 피부 전달량과 모발 재생 효과를 살펴본 것이다. 동물실험에서는 RF 마이크로포레이션을 병행했을 때 미녹시딜만 바른 경우보다 피부에 축적된 미녹시딜의 양이 최대 2.4배 증가했다.
아직 동물실험 단계지만 얼굴 피부를 관리하던 가정용 미용기기의 기술이 두피와 탈모 치료 성분의 전달 연구로까지 확장됐다는 점은 흥미롭다. 화장품 회사의 오랜 질문이 ‘피부에 무엇을 바를 것인가’였다면 이제는 ‘그 좋은 성분을 피부에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까지 기술의 영역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기계와 화장품의 시너지이 흐름은 최근 갑자기 시작된 것은 아니다. 특히 일본에서는 전자회사와 미용기기 전문기업들이 오래전부터 화장품과 기기의 경계를 넘나들어왔다.
파나소닉은 얼굴용 미용기기를 60년 넘게 연구해왔다. 현재도 각질층과 얼굴 근육을 주요 연구 대상으로 두고 RF와 EMS, 이온 등 다양한 기술을 가정용 기기에 적용한다. 홈 뷰티 디바이스가 최근 갑자기 생겨난 유행이라기보다 오랜 시간 축적된 하나의 기술 산업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회사다. 전자회사가 가진 기술을 뷰티에 접목시켜 꾸준히 쌓아왔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야만(YA-MAN)은 1978년 설립 이후 미용기기를 전문적으로 만들어왔다. 특히 야만은 RF를 중심으로 EMS, LED, 미세전류, 이온도입 같은 기능을 하나의 기기에 결합한다. 최근 제품에서는 비타민C 유도체나 트라넥사믹애씨드가 든 화장품과 함께 사용할 것을 제안하고, 아예 세럼과 크림, 부스터 패드 같은 자체 화장품도 함께 판매한다. 기계와 화장품을 별개의 상품으로 보지 않고 하나의 관리 시스템으로 묶는 것이다.
영국의 뷰티테크 브랜드 LYMA는 이를 또 다른 방식으로 보여준다. 대표 제품인 LYMA Laser는 저출력 근적외선 레이저를 사용하는 홈케어 기기인데, 브랜드는 레이저와 함께 사용하도록 Oxygen Mist와 Glide, 세럼과 크림까지 직접 개발했다. 실제로 LYMA는 자사의 스킨케어 제품들이 레이저 기술과 함께 작동하도록 설계됐다고 설명한다. 이제 뷰티 디바이스 회사가 기계만 만들고, 화장품 회사가 화장품만 만드는 경계도 점점 흐려지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반대 방향의 움직임도 나타난다. 디바이스 회사가 화장품을 만드는 것을 넘어, 이번에는 화장품 회사가 자사 화장품의 효과를 끌어올리기 위한 기기를 직접 설계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랑콤이다. 2025년 랑콤은 ‘레네르지 나노 리서페이서 400 부스터’를 공개했다.
400여 개의 초정밀 나노팁이 분당 약 5,000회 움직이며 피부 표면에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 경로를 만들고, 함께 사용하는 레네르지 H.C.F. 트리플 세럼이 각질층에 전달되는 것을 높이도록 설계한 제품이다. 화장품 회사가 더 좋은 세럼을 만드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세럼이 피부에 도달하는 방법까지 제품의 일부로 설계하기 시작한 것이다.
랑콤과 LYMA가 화장품과 기기를 하나의 시스템으로 묶었다면, 아예 ‘성분을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한 회사도 있다.
미국의 Droplette는 MIT 출신 Madhavi Gavini와 Rathi Srinivas가 만든 뷰티테크 브랜드다. 처음부터 화장품을 만들기 위해 시작한게 아니었다. 피부가 매우 약해 연고를 바르는 것조차 고통스러운 희귀질환 환자에게 약물이나 유효성분을 편안하게 전달할 방법을 연구하다가 피부에 직접 문지르지 않고 성분을 전달하는 미세 분사 기술을 개발했다. 이 기술은 이후 NASA의 연구 지원을 받으며 발전했고, 스킨케어 영역으로 확장됐다.
전용 세럼 캡슐을 기기에 넣으면 액체를 지름 5마이크론 미만의 미세한 하이드로미스트로 바꿔 피부에 분사한다. 콜라겐, 레티놀, 트라넥사믹애씨드, 성장인자 등 피부 고민에 따라 캡슐을 골라 쓰는 방식이다. 기계를 한 번 사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기기+전용 화장품’이 하나의 스킨케어 루틴이 되는 셈이다.
가전기업 샤크(Shark) 의 FacialPro Glow는 에스테틱이나 전문 관리에서 익숙했던 하이드로 페이셜의 방식을 집으로 가져왔다. AHA·BHA를 활용한 각질 관리와 하이드로 익스트랙션, 수분 공급을 10분짜리 홈케어 안에 묶었다. 전문 관리실에서 받던 하나의 관리 프로토콜 자체를 손에 들 수 있는 크기로 줄인 것이다.
화장품의 언어가 달라지고 있다이렇게 최근의 기기들을 쭉 보다 보면 뷰티에서 ‘좋은 제품’을 설명하는 언어 자체가 달라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 럭셔리 화장품이 희귀한 식물과 발효, 캐비아와 트러플, 24K 골드, 장인의 제조법을 이야기했다면 새로운 뷰티 디바이스의 언어는 사뭇 다르다
그렇다고 기기가 화장품을 대체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둘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화장품을 바른 뒤 흡수를 돕는 기기, 특정 디바이스와 함께 쓰도록 설계한 세럼과 젤처럼 ‘무엇을 바르느냐’와 ‘어떻게 전달하느냐’를 하나의 루틴으로 묶는 제품이 늘어난다.
메디큐브는 기기와 스킨케어를 하나의 루틴으로 묶고 있고, YA-MAN 역시 미용기기와 함께 사용할 화장품을 판매한다. 최근 LG생활건강이 다시 전개하는 프라엘 역시 ‘디바이스 전용 화장품’을 함께 내놓았다. 결국 홈 디바이스가 만들어내고 있는 것은 화장품과 전문 시술 사이의 중간지대이다. 병원 시술을 그대로 대체할 만큼 강한 에너지를 사용할 수는 없지만, 크림만 바르던 홈케어보다는 훨씬 적극적으로 피부에 빛과 열, 전기적 자극을 전달하고 화장품의 사용 방식까지 바꾼다. 그렇다면 K뷰티는 이 교차점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화장품도 잘 만들고 전자기술도 강한 한국은, 이 두 산업이 만나는 지점에서 어떤 제품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물론 우리에게는 메디큐브 AGE-R이라는 눈에 띄는 성공 사례가 있다. 전 세계 누적 판매 600만 대를 넘어선 숫자는 분명 의미가 크다.
다만 압도적인 판매량과 마케팅 화제성이 곧 기술적 우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소비자의 입장에서는 이 작은 기기들이 실제로 어느 정도의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 브랜드가 제시하는 임상 데이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마케팅의 언어와 기술의 실효성 사이를 계속 들여다볼 필요도 있다. 이 부분에서 일본 시장이 쌓아온 ‘시간’이 눈에 들어온다. YA-MAN은 1978년부터 미용기기 기술을 축적해왔고, 파나소닉과 ReFa를 비롯한 여러 회사는 미용기기를 일본 소비자의 일상적인 뷰티 소비 안에 꾸준히 자리 잡게 했다.
잠깐 유행하는 신사업이 아니라 ‘뷰티’를 오랜 시간 기술 산업으로 다뤄온 회사들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도 이런 시도가 있었다. LG전자는 2017년 프라엘을 내놓으며 LED 마스크와 갈바닉 등 홈 뷰티 기기를 선보였고, 아모레퍼시픽 역시 메이크온을 통해 화장품과 디바이스를 결합하려는 시도를 해왔다. 하지만 같은 기간 K뷰티 화장품이 세계적으로 성장한 속도와 비교하면, 한국의 대형 전자·뷰티 기업이 만들어낸 홈 뷰티 디바이스의 글로벌 존재감은 아직 화장품만큼 크지 않다.
다행히 최근 다시 움직임이 보인다. 지난해 LG전자가 시작했던 프라엘을 LG생활건강이 넘겨받았다. 이후 갈바닉 부스터와 RF·일렉트로포레이션·미세전류·EMS를 결합한 써마샷을 내놓았고, 올해에는 세 가지 LED 파장을 활용하는 ‘멜라빔 토닝’까지 출시했다. 갈바닉 부스터는 미국 시장에도 진출했다. 전자회사가 만든 기기를 화장품 회사가 넘겨받아 다시 화장품과 함께 설계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꽤 상징적이다.
한국은 화장품을 잘 만든다. 전자제품도 잘 만든다. 반도체와 배터리, 디스플레이와 센서, 정밀 제조 기술에서도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두 산업이 만나는 지점에서 바로 떠오르는 한국 브랜드는 아직 많지 않다. K뷰티의 다음 확장이 꼭 더 많은 세럼과 쿠션에만 머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화장품에서 쌓아온 감각과 속도에 우리가 잘하는 전자와 센서, 정밀 제조 기술이 제대로 붙는다면 할 수 있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많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