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뮬러원(F1)이 도시를 점령했다. 전용 경기장 안에서만 펼쳐지는 레이스가 관광도시 한복판으로 들어오면서다. 도로는 서킷이 되고, 랜드마크는 관중석의 배경이 된다. 다음 달 대회를 앞둔 싱가포르는 단순한 개최지가 아니라 도심 곳곳이 레이스의 현장이 되고 있었다.
지난 8일 싱가포르 시청 인근 도로에는 평소와는 다른 구조물이 들어섰다. 조명탑 설치 작업이 한창이었고, 도로 곳곳에는 철제 펜스가 세워졌다. 싱가포르를 대표하는 대관람차 싱가포르 플라이어 인근에서는 관람석 설치 작업도 진행 중이었다. 오는 10월9일~11일 열리는 'F1 싱가포르 그랑프리'를 한 달가량 앞둔 시점, 레이스가 시작되려면 아직 시간이 남았지만 도시는 이미 경기장으로 변할 준비로 분주한 모습이었다.
그랑프리 개최를 알리는 표지판이 눈에 띄었고, 평소 관광객과 출퇴근 차량으로 붐비던 도로에는 공사 자재와 통제 시설물이 하나둘 들어섰다. 다음 달 열릴 대회를 앞두고 도로가 경기장으로 바뀌는 순간을 미리 볼 수 있었다.
현지에서 만난 교민 하나 씨는 "도심 약 5㎞ 구간에서 레이스가 열리는데, 이 시기에는 정말 많은 관광객이 싱가포르로 몰려온다"며 "개인 항공기를 타고 오는 관광객이 있을 정도"라고 말했다.
실제로 싱가포르 그랑프리가 열리는 마리나베이 스트리트 서킷은 별도의 전용 경기장이 아니다. 도심의 도로를 막아 레이스 트랙으로 활용한다. 현재 서킷 길이는 4.927㎞다. 싱가포르 플라이어와 마리나베이샌즈 등 도심의 랜드마크를 배경으로 레이스가 펼쳐지는 이유다.
싱가포르가 F1의 상징적인 개최지가 된 출발점은 2008년이다. 당시 싱가포르는 F1 사상 첫 야간 레이스를 개최했다. 도심 도로를 활용한 스트리트 서킷에 야간 레이스라는 형식을 결합하면서 F1 경기 자체가 도시의 야경과 결합하는 새로운 관람 경험을 만들어냈다.
당시 싱가포르 GP가 공개한 조명 시스템에는 약 1500개의 조명 프로젝터가 사용됐고, 서킷 전체에는 평균 약 3000럭스의 조도가 필요했다. 일반 경기장보다 훨씬 밝은 조명을 설치해 야간에도 TV 중계와 주행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시스템이었다. 이 방식의 특징은 경기장이 도시와 분리돼 있지 않다는 데 있다.
관람객은 서킷으로 이동하는 동시에 싱가포르의 도심으로 들어간다. 레이스를 보기 위해 찾은 관광객이 호텔과 식당, 쇼핑몰을 이용하고, 도심 곳곳에서 공연과 엔터테인먼트를 함께 즐기는 구조다.
싱가포르 GP는 실제로 레이스와 공연·라이프스타일 프로그램을 결합하는 방식으로 행사를 키워왔다. 2025년 대회에는 30만641명이 방문했고, 싱가포르 GP 측은 이를 역대 두 번째로 많은 관람객이라고 밝혔다.
2023년 시작한 라스베이거스 그랑프리는 미국 라스베이거스 스트립을 레이스 무대로 활용한다. 마이애미 역시 도심과 관광 인프라를 활용한 이벤트형 그랑프리로 자리 잡았다. F1이 전용 서킷만을 찾는 스포츠에서 벗어나 관광도시 자체를 경기장으로 활용하는 이벤트로 확장하고 있는 셈이다.
여행상품도 이 흐름에 맞춰 달라지고 있다. 국내 여행업계에서는 F1 개최 도시를 겨냥한 관전 상품이 등장하고 있다. 연습주행부터 예선, 본선까지 F1 주말 일정을 현장에서 경험하도록 구성한 라스베이거스 그랑프리 상품에 4성급 호텔 숙박을 결합하는 식이다.
트립닷컴에 따르면 올해 1~9월 한국 사이트의 F1 관련 검색량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43% 늘었다. 글로벌 검색량은 98% 증가했다. 경기 하나를 보기 위해 도시를 찾고, 그 도시에서 며칠을 머무는 '직관 여행'이 하나의 여행 방식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트립닷컴 관계자는 "최근 여행객들은 유명 관광지를 둘러보는 데 그치지 않고 대형 스포츠 경기나 콘서트를 현장에서 직접 즐기는 '취향 중심 여행'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며 "F1과 같은 글로벌 스포츠 이벤트가 현지 숙박·관광 수요를 견인하는 핵심 동인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싱가포르 GP 측은 2026년에도 공연과 식음료, 라이프스타일 콘텐츠를 포함한 Circuit Park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레이스를 스포츠 이벤트 이상의 도시 행사로 확장하고 있다. 싱가포르의 강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F1을 보기 위해 별도의 경기장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여행자가 머무는 도시 자체가 경기장이 된다.
시청 앞 도로에 세워진 조명탑과 싱가포르 플라이어 옆에 들어선 관람석. 레이스는 10월 9일 시작하지만, 싱가포르의 도심은 벌써 F1의 무대가 됐다.
싱가포르=신용현 한경닷컴 기자 yonghy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