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8일 미국 텍사스 오스틴의 한 호텔. 이날 오스틴에서 열린 방산 콘퍼런스 ‘페드 슈퍼노바’에 참가한 유망 스타트업에 공동 투자하기 위해 서로 다른 벤처캐피털(VC) 소속의 조던 와베와 데릭 큐이가 투자 금액을 논의했다. 와베는 실리콘밸리, 큐이는 뉴욕에서 왔다. 수년 전만 해도 텍사스 기반의 스타트업은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실리콘밸리와 뉴욕 등으로 달려가야 했지만, 이젠 투자자가 텍사스로 오고 있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실리콘밸리의 유명한 VC인 8VC는 2020년 본사를 오스틴으로 옮기며 “미래는 텍사스에 있다”고 말했다. ◇딥테크의 성지 ‘실리콘힐스’
시장조사업체 피치북에 따르면 지난해 VC가 오스틴 지역에 투자한 금액은 72억4000만달러로 1년 전보다 80% 급증했다. 올 들어선 1분기에만 역대 최대인 48억5000만달러의 VC 자금을 끌어모았다. 이 추세라면 올해 오스틴에 투자된 VC 자금만 200억달러(약 27조6000억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1분기에 투자된 기업에는 무인함정 기업 사로닉, 휴머노이드 기업 앱트로닉, 우주통신 기업 세슘아스트로 등이 포함됐다. 이들 기업은 오스틴의 테크 생태계를 잘 보여준다. 텍사스에서 25년간 스타트업에 투자한 VC 라이브오크의 크리슈나 스리니바산 파운딩파트너는 “최근 오스틴에서는 로봇공학·방산 스타트업이 급격하게 성장하고 있다”며 “하드웨어 기업과 연구 생태계를 바탕으로 오스틴은 딥테크의 중심지가 됐다”고 말했다. 미 서부 베이 지역의 실리콘밸리를 본떠 오스틴을 ‘실리콘힐스’라고 부르는 배경이다.
오스틴에 테크 생태계를 가능하게 한 건 글로벌 대기업이다. 텍사스를 대표하는 반도체 기업 텍사스인스트루먼트(TI·1941년 설립)와 삼성전자(1996년 진출), 서버·스토리지 기업 델(1984년)에 더해 2021년 테슬라까지 이전하며 하드웨어 생태계가 완성됐다. 여기에 텍사스대(UT)오스틴캠퍼스 등 지역의 뛰어난 인력 풀이 시너지를 더했다. UT오스틴은 로보틱스 관련 학과를 묶어 교내 연구소 ‘텍사스로보틱스’를 운영 중이다. UT오스틴에서 파생된 로보틱스 기업만 앱트로닉 등 14곳이다. ◇군·정부가 씨앗 뿌려오스틴의 딥테크 생태계를 창시한 곳은 UT오스틴에 있는 미 육군미래사령부(AFC)다. 1960년대 미 국방고등연구계획국(DARPA)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과 폭격기 등에 들어가는 반도체를 지역 반도체 기업에 주문하며 실리콘밸리가 성장했듯이 실리콘힐스에서는 AFC가 그 역할을 맡았다.
로봇, 드론, 인공지능(AI) 등 차세대 기술을 전력화하기 위해 2018년 세워진 AFC는 산하 육군응용연구소(AAL)를 오스틴 스타트업 허브인 캐피털팩토리에 입주시켜 스타트업을 국방부 조달시장과 연결했다. 앱트로닉도 2020년 AAL의 ‘로봇팔 탄약 보급 프로젝트’를 수주하며 체급을 키웠다.
텍사스 남부 휴스턴에선 1961년 설립된 미 항공우주국(NASA) 존슨우주센터가 스타트업의 초기 발주처 역할을 하고 있다. 이곳은 인류 최초의 달탐사 임무인 아폴로 미션부터 최근 달 뒷면을 보고 온 아르테미스 프로젝트까지 지휘했다. 여기에 2024년 일론 머스크의 우주기업 스페이스X는 캘리포니아 호손 본사를 발사장이 있는 텍사스 남쪽 보카치카로 옮겼다.
보수 성향이 짙어 군과의 협력이 자연스럽다는 텍사스주의 특성은 디펜스테크 성장에 일조하고 있다. 텍사스에 생산시설을 두고 있는 고체로켓모터 제조 기업 엑스보의 마크 커스퍼로위츠 마케팅디렉터는 “실리콘밸리에서는 직원들이 군 협력을 반대해 어려움이 많지만 텍사스에선 그럴 일이 없다”고 했다.
오스틴=김인엽 특파원 insid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