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찾은 네덜란드 로테르담의 실내 시장 마켓홀. 향신료와 치즈 향이 뒤섞인 시장 한복판에 자리잡은 한국식 분식 매장 앞에 현지인들이 길게 줄 지어 있었다. 주문 모니터에는 치킨과 떡볶이, 볶음면 메뉴 사이로 삼양식품의 캐릭터 '호치'가 선명하게 보였다.
네덜란드 최대 슈퍼마켓 체인 알버트하인(Albert Heijn)의 매대에선 K푸드의 존재감을 실감할 수 있었다. 선반 중앙의 주인공은 삼양 까르보불닭볶음면(1.99유로)과 프로틴 파스타 탱글(2.29유로)이다. 바로 옆엔 CJ제일제당의 비비고 '코리안 스타일 우동'과 볶음면이, 아래 칸에는 농심 신라면과 초록색 비건 라벨이 붙은 채식 라면 순라면이 빼곡했다.
현지 소비자들 반응도 자연스러웠다. 매장에서 만난 네덜란드 거주민 A씨는 "주변 친구들은 한국이란 나라는 잘 몰라도 불닭과 비비고는 안다"고 말했다. 한국 라면 역시 마찬가지다. 로테르담에서 만난 직장인 알렉스 씨는 "한국 라면 중 신라면이 가장 유명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너무 매워 순라면을 더 즐겨 찾는다"고 전했다.식문화 적응과 식물성 제품 전략
현지 마트 매대와 소비 패턴에서 볼 수 있듯 K푸드가 현지화를 통해 유럽 식문화를 파고들고 있다. 국물 요리의 낯선 취식 방식과 매운맛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크림과 치즈 풍미를 더한 까르보불닭볶음면은 네덜란드 유통업계 시상식 '휠오브리테일(Wheel of Retail) 2024'에서 슈퍼마켓 최고의 신제품으로 꼽혔다.
유럽연합(EU)의 육류 수입 규제는 '100% 식물성' 시장 진입의 기회가 됐다. 고기 성분을 빼고 버섯이나 효모 추출물로 맛을 낸 순라면, 비비고 식물성 만두는 현지인들의 가치소비·채식 열풍과 맞물려 매대에 안착했다.유통망 진입 확대와 제품군 다변화국내 기업들은 단일 품목 흥행을 넘어 현지 주류 매대 전반으로 영역을 넓히고 있다.
CJ제일제당은 알버트하인 입점을 시작으로 윰보, 호오흐플리트, 플러스 등 현지 주요 채널을 연이어 뚫었다. 그 결과 지난해 기준 네덜란드 기업·소비자간거래(B2C) 만두 시장 점유율 49%로 1위에 올랐다. 알버트하인에서는 냉동 만두와 치킨 외에도 컵우동 형태의 우동누들과 볶음면 등 상온 면류까지 라인업을 확장했다.
삼양식품 역시 불닭볶음면을 넘어 소스와 파스타로 외연을 넓히고 있다. 유럽 판매법인 매출은 2024년 326억원에서 지난해 1830억원으로 급증했다. 올해 들어선 2분기에만 1576억원의 판매고를 올렸다. 파스타 본고장인 유럽에서 프로틴 파스타 탱글의 5~6월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148% 뛰었다. 지난 6월에는 네덜란드 바헤닝언 인근에 유럽 R&D(연구개발) 오피스를 열고 현지 맞춤형 제품 개발 체계도 갖췄다.
농심은 영국 테스코, 독일 레베, 프랑스 까르푸 등 유럽 핵심 채널을 중심으로 2030년 유럽 매출 3억달러 달성을 겨냥하고 있다. 서구권 채식 소비자 사이에서 자리 잡은 순라면을 앞세워 독일, 네덜란드, 영국 등 현지 시장을 세분화해 공략한다는 구상이다.물류 거점 중심에서 현지 생산 체제로 전환수치상으로는 이 같은 흐름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모습이다. 대(對)네덜란드 가공식품 직수출액은 2024년 9601만달러에서 지난해 8515만달러로 11.3% 줄며 숨고르기에 들어갔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는 이를 두고 폭발적 팽창기를 지나 현지 가정 내 조리 문화와 결합한 '실수요 중심의 안정기'에 접어들었다고 풀이했다.
실제로 기업들은 유럽의 관문 성격인 네덜란드 집중을 벗어나 유럽 전역의 생산·물류 거점 구축으로 기어를 바꿔 넣고 있다. 언뜻 지표상 후퇴처럼 보이지만 사실 유럽 전역으로 K푸드 기반이 퍼져나가는 '도약의 반증'이라 할 수 있는 셈.
CJ제일제당은 늘어나는 현지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헝가리 부다페스트 근교에 유럽 신공장을 짓고 하반기부터 만두와 치킨의 현지 직접 생산에 돌입한다. 영국, 프랑스, 헝가리 법인을 연이어 세우며 대륙 전역의 유통망을 묶는 전략이다. 삼양식품은 프랑스 유통 전문기업과 손을 잡는 등 영국, 독일, 네덜란드, 프랑스, 폴란드 등 5대 거점국을 중심으로 직배송 망을 넓히고 있다.
농심 역시 유럽 수출 전초기지 역할을 맡을 부산 녹산 수출 전용 스마트 팩토리 등을 앞세워 대륙 전역으로 공급망을 넓히고 있다. 농심 관계자는 "유럽 전역에서 급증하는 라면 수요에 맞춰 생산 거점을 정비하고 현지 맞춤형 제품 공급을 확대해 대륙 공략 속도를 끌어올릴 것"이라고 말했다.
로테르담(네덜란드)=박상경 한경닷컴 기자 highseou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