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시대에 오히려 사람의 손을 거쳐야 완성되는 아날로그 제품들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필름카메라부터 종이 수첩, 뜨개질, 퍼즐, LP까지 디지털로 얼마든지 대체할 수 있는 상품에 소비자들이 다시 지갑을 열면서 관련 기업의 실적과 주가에도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9월 13일(현지 시간) 파이낸셜타임스(FT)는 최근 소비자와 투자자 사이에서 나타나는 이 같은 흐름을 ‘안티 AI 포트폴리오’로 묶어 조명했다. 흥미로운 점은 이런 소비가 ‘디지털과의 결별’을 뜻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소비자들은 틱톡이나 인스타그램에서 ‘노트 꾸미기’ 영상을 본 뒤 실제 노트와 펜을 구매하고 온라인에서 뜨개질이나 공예 콘텐츠를 접한 뒤 직접 손으로 만드는 취미를 시작한다. 디지털 공간에서 발견한 아날로그 경험을 실제 소비와 활동으로 이어가는 셈이다. 기술을 거부하기보다는 디지털과 물리적 경험 사이의 균형을 찾으려는 소비에 가깝다.
실제 아날로그 취미에 대한 관심은 다양한 분야에서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 미국 유통업체 마이클스는 뜨개질과 저널 작성, 미술용품 등 아날로그 취미 관련 검색량이 최근 6개월간 136% 증가했다고 밝혔다.
관심은 실제 소비로도 이어졌다. 수년간 판매 부진을 겪었던 수첩 브랜드 몰스킨은 올해 상반기 저널 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6% 이상 늘었다. 직접 조립하고 색칠하는 미니어처 게임처럼 손을 써야 하는 취미도 꾸준한 수요를 보이고 있다. ‘워해머’로 알려진 영국 게임즈워크숍은 매출의 대부분을 미니어처와 관련 제품에서 거뒀다.
스마트폰에 밀려났던 카메라와 실물 콘텐츠도 다시 소비자를 끌어들이고 있다. 후지필름의 즉석카메라 ‘인스탁스’ 판매는 최근 분기 약 30% 증가했다. 워너뮤직의 바이닐과 CD, DVD 매출도 최근 분기 전년 대비 15% 늘었다. 닐슨IQ에 따르면 스도쿠와 숫자 퍼즐 판매량 역시 지난해 10% 이상 증가했다.
이 같은 소비 변화는 기업 실적과 주가에도 반영되고 있다. 영국에서 서적과 취미용품을 판매하는 더웍스(The Works)의 주가는 올해 들어 약 세 배 수준으로 뛰었다. 샤피와 페이퍼메이트 등 필기구 브랜드를 보유한 미국 뉴웰브랜즈 역시 필기구 사업의 호조에 힘입어 실적 회복세를 나타냈다.
결국 소비자들이 다시 찾는 것은 단순히 ‘오래된 물건’이라기보다 디지털이 대신하기 어려운 경험에 가깝다. 손으로 글씨를 쓰고, 사진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시간을 들여 무언가를 완성하는 과정은 속도와 효율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AI가 일상을 더욱 빠르고 편리하게 만들수록 오히려 이런 ‘불편한 시간’ 자체가 새로운 소비 가치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FT는 AI 기술이 고도화될수록 화면 밖의 경험을 찾으려는 수요 역시 커질 가능성에 주목했다. AI가 더 많은 일을 대신해주는 시대일수록 역설적으로 ‘직접 하는 경험’의 희소성이 높아지고 있는 셈이다.
김세은 인턴기자 seni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