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거래위원회가 올해 8개월 동안 대기업(공시대상기업집단)에 부과한 과징금이 최근 4년 치 과징금을 모두 합한 것보다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물가당국’을 자처하며 대규모 담합 사건 조사에 드라이브를 건 결과다. “‘담합하면 망한다’는 생각이 들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이재명 대통령 주문에 따라 공정위가 과징금 하한선을 끌어올리고, 반복 위반 시 과징금을 가중하는 등 소관 법령을 손보고 있어 과징금 규모는 더 늘어날 전망이다.
13일 신동욱 국민의힘 의원이 공정위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올해 1~8월 공정위가 대기업에 부과한 과징금은 1조3615억원으로 8개월 만에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공정위가 2022년부터 지난해까지 4년간 대기업에 매긴 과징금(1조277억원)보다 더 많다. 공정위는 올해 전분·전분당(7476억원)과 밀가루(6710억원), 설탕(3960억원) 등 굵직한 담합을 적발해 대규모 과징금을 부과했다.
범위를 대기업에서 전체 기업으로 넓히면 올해 8개월 동안 부과한 과징금은 2조5000억원에 달한다. 2017년 기록한 역대 최대치(1조3308억원)의 두 배에 가까운 액수다. 국고채 입찰 담합과 쿠팡이츠, 배달의민족 등 배달앱 최혜 대우 요구 제재 등 굵직한 사건이 남아 있어 올해 과징금 부과액은 더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공정위는 정부가 형사 처벌을 없애는 대신 경제 제재를 강화한다는 취지로 추진하는 ‘경제형벌 합리화’에 보조를 맞추기 위해 과징금 관련 규정을 강화하고 있다. 하지만 ‘배임죄 폐지’ 등 형사 처벌을 완화하는 법안 개정이 지연되면서 경제 제재(과징금)만 더 엄격해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신동욱 의원은 “형벌은 그대로 둔 채 과징금만 높이면 기업 경영을 위축시킬 우려가 있다”며 “경제형벌 합리화 취지에 맞게 과징금 강화와 형벌 완화를 균형 있게 추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담합 과징금' 톱5 중 3건이 올해…공정위, 대기업 엄벌 더 세졌다
경제형벌 완화는 지지부진한데 과징금 제재만 세지며 경영 위축공정거래위원회는 지난 5월 밀가루 가격을 담합한 사조동아원에 1831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자기자본(1270억원)과 시가총액(당시 1423억원)보다 큰 규모의 ‘과징금 폭탄’에 1000원대 초반이던 사조동아원 주가는 8월 600원대로 급락했다. ‘동전주’로 전락해 유가증권시장 퇴출 위기를 맞은 사조동아원은 10 대 1 주식 액면병합을 통해 가까스로 상장을 유지했다. 공정위의 과징금이 회사를 존폐 위기에 내몰 정도로 세졌다는 평가를 받는 사례다.◇법 개정 지연에 과징금만 강화13일 공정위에 따르면 올해 과징금 부과가 결정된 사건 3개가 역대 담합사건 과징금 ‘톱5’에 올랐다. 전분·전분당 가격을 담합한 대상 등 4개사에 7476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한 사건은 역대 1위 기록을 세웠다. 대한제분 등 7개사의 밀가루 담합 사건(6710억원)과 CJ제일제당 등 3개사의 설탕 담합 사건(3960억원)은 각각 2위, 4위에 올랐다. 공정위가 올해 8개월간 대기업에 부과한 과징금(1조3615억원)이 지난 4년치 과징금(1조277억원)을 넘어선 것은 이처럼 굵직한 담합 사건이 잇따랐기 때문이다.
공정위는 대형 사건의 조사를 마무리하고, 위원회 심의 절차가 끝난 시점이 우연히 맞물린 결과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업계에선 공정위가 이재명 대통령의 주문에 따라 ‘물가와의 전쟁’에 나서 식품 대기업 등에 대한 조사 강도를 높이고, 심의를 서두른 결과라고 해석했다.
공정위는 과징금 부과 기준을 대폭 강화하는 제도 개편 작업도 하고 있다. 소관 법령 시행령과 고시를 개정해 과징금 부과 하한선을 높이고, 반복적인 법 위반 때 과징금을 가중하기로 했다. 과징금 강화는 범정부 차원에서 추진 중인 경제형벌 합리화 정책의 일환이다. 정부는 제재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 형사 처벌을 완화하는 대신 과징금 등 금전적 제재를 대폭 강화하기로 했다.
하지만 형사처벌을 완화하는 법 개정이 지연되면서 과징금 규정만 강화되고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경제형벌 합리화는 재정경제부에서 법제처로 주관 부처가 바뀌는 과정에서 추진 속도가 느려졌다. 지난해 10월 논의를 시작한 배임죄 폐지도 진도를 나가지 못하고 있다. 공정위 관계자는 “과징금 상한선 상향은 형사처벌 완화와 패키지로 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며 “관련 법안의 통과를 기다리는 중”이라고 설명했다.◇‘조사 권한’강화…인력도 증원대기업에는 과징금만 높이는 게 아니라 형벌 규정도 강화하고 있다. 공정위는 지난달 행정예고한 기업집단 관련 고발지침 개정안에 기업집단 지정 자료 제출이 누락된 사실을 총수가 몰랐더라도 중대성이 크면 고발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지금까지는 중대한 사안이어도 총수가 누락 사실을 알았을 가능성이 낮으면 고발 대상에서 제외했다.
앞으로는 직원 실수로 자료가 누락돼도 총수가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다는 얘기다. 공정위는 형벌 규정을 강화하는 동시에 지정 자료 제출을 누락하면 총수 개인에게 회사 자산총액 또는 매출액 중 큰 금액의 10%까지 과징금을 부과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다음달 예고된 중점조사기획단 출범도 재계를 떨게 한다. 중점조사기획단은 옛 조사국의 역할을 이어받는다. 조사국은 1996년 처음 출범한 조직으로 대기업 부당 내부거래와 불공정 행위에 관한 조사를 전담했다. 주요 대기업을 상대로 전방위 기획조사를 벌여 ‘재계 저승사자’라는 별명이 붙었다.
하지만 기업 경영 활동을 과도하게 위축시킨다는 비판이 이어져 2005년 폐지됐다. 이번에 조사국이 중점조사기획단으로 부활하면 대기업을 겨냥한 대규모 기획조사가 재개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공정위는 조사 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다음달까지 인원을 237명 증원할 계획이다. 올해도 이미 167명을 늘렸다.
조사 권한도 강화한다. 공정위의 현장 조사와 자료 제출 명령 등은 강제성이 없다. 최근 쿠팡과 한화 등 조사 대상 기업이 공정위가 적법한 절차를 따르지 않고 조사를 진행했다며 법적 대응에 나선 이유다. 공정위는 이 같은 반발을 차단하기 위해 조사에 불응하는 기업에 매출의 1%를 과징금으로 부과하는 내용의 법 개정을 준비하고 있다.
박종관 기자 pj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