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속도로를 달리다가 복잡한 분기점에 들어서면 본능적으로 분홍색이나 녹색 선부터 찾게 된다. 내비게이션이 “오른쪽 차로를 이용하세요”라고 거듭 말하지 않아도 노면 색깔 유도선만 따라가면 자연스럽게 갈 길을 찾는다. 적은 비용으로 운전자 편의와 교통안전을 획기적으로 높인 교통 혁신 사례다.
시스템의 힘은 이런 것이다. 운전자에게 ‘정신 차리고 운전하라’고 훈계하지 않는다. 길을 잘못 든 사람을 탓하는 대신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도로에 직관적으로 그려줬다.
판단하기 쉽게 만들자 행동이 바뀌었고, 반복된 행동은 일상적인 습관이 됐다. 작은 선 하나가 도로 위 길찾기 문화를 바꾼 것이다. 미국에서 운전을 처음 하는 사람이라면 어느 곳을 가더라도 낯선 장면을 마주한다. 신호등이 없는 주택가 교차로에서도 차들이 어김없이 멈춰 선다.
빨간 팔각형의 ‘STOP(일시정지)’ 표지판이 보이면 앞에 차가 있든 없든 무조건 일단 정지한다. 바퀴가 완전히 멎은 뒤 먼저 도착한 차부터 차례로 출발하는 광경이 낯설지 않다. 효과는 수치로도 확인된다.
2020년 미국 교통연구위원회(TRB) 학술지인 ‘교통연구기록’에 발표된 연구는 워싱턴DC 53개 교차로를 분석했다. 일부 방향의 차량만 정지하던 교차로를 모든 방향 차량이 일단 멈추는 올웨이스톱 방식으로 바꾼 결과 전체 사고는 36%, 부상 사고는 42% 감소했다. 델라웨어주에서도 통행량이 비교적 적은 20개 교차로에 같은 방식을 적용한 뒤 사고 발생을 비교한 결과 전체 사고는 71%, 사망 사고는 75%, 부상 사고는 90% 줄었다.
핵심은 운전자에게 복잡한 판단을 요구하지 않는 데 있다. 표지가 보이면 멈추고, 먼저 온 차부터 간다. 규칙이 단순하고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되니 상대방 움직임도 예측할 수 있다. 도로에서 과속 못지않게 무서운 것은 서로 무엇을 할지 모르는 불확실성이다.
한국의 골목길 교차로는 정반대다. 왼쪽에서도 차가 오고 오른쪽에서도 차가 온다. 누가 먼저 가야 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한쪽이 속도를 줄이면 다른 차가 먼저 치고 나간다. 상대방이 멈출 것이라는 믿음이 없으니 오히려 교차로에 머리를 먼저 들이미는 차가 유리해진다. 교차로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위험천만한 ‘눈치 게임’이다.
그 대가는 보행자가 치른다. 2023년 교통사고 사망자 가운데 보행 중 사망자 비율이 34.7%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18%의 1.9배에 달했다. 보행 사망사고의 절반 이상(54%)은 폭 9m 미만 이면도로에서 발생했다. 무단횡단을 제외한 보행 사망자의 73.4%는 운전자의 보호를 받지 못해 숨졌다. 보행자에게 더 위험한 곳은 신호등이 촘촘한 대로가 아니라 무방비의 생활도로와 골목길이다.
법이 없는 것도 아니다. 도로교통법은 교통정리가 없고 좌우를 확인하기 어렵거나 교통이 빈번한 교차로에서 일시정지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에선 법전 속에 잠들어 있다. 이면도로 가운데 시야가 나쁘고 보행자가 많거나 사고 위험이 높은 교차로부터 붉은 팔각형 일시정지 표지와 정지선을 체계적으로 설치하자. 필요한 곳에는 네 방향 차량이 모두 멈추는 올웨이스톱을 도입할 수 있다.
좋은 교통 시스템은 시민에게 ‘정신 차리라’고 다그치지 않는다. 조심하는 행동이 저절로 나오도록 환경을 설계한다. 기본적인 안전장치조차 갖추지 않은 채 높은 사고율의 책임을 시민의 낮은 교통의식에만 돌려서는 안 된다. 법전에 잠든 ‘일시정지’를 이제 도로 위 습관으로 깨울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