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대표하는 극단엔 무엇이 가장 중요할까. 흥행하는 작품을 만드는 것일까, 안정적 제작 기반을 다지는 일일까. 2024년 취임한 박정희 국립극단 단장 겸 예술감독(69)이 내린 답은 연극의 본질에 있었다. 현대인이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는지, 이 작품이 오늘의 관객을 건드릴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고 봤다. 민간 극단에서 오래 활동해온 박 예술감독은 취임 후 국립 단체의 역할을 고민하며 동시대 관객에게 필요한 이야기를 무대에 올리는 데 초점을 맞췄다. 중단된 지 15년 된 ‘희곡 공모전’을 부활시켜 신진 작가를 발굴한 것도 그런 취지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국립극단의 작품을 부지런히 해외에 알렸다. 박 예술감독은 최근 한국경제 아르떼와 만나 국립극단이 지금 어떤 이야기를 전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 이야기를 세계로 확장할 방법은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을 밝혔다. ‘지금 필요한 이야기’에 집중국립극단은 지난해 연극 ‘그의 어머니’를 국내 초연한 뒤 올해 다시 무대에 올렸다. 성폭행 가해자의 어머니를 주인공으로 한 이 극은 가족의 범죄 이후 구성원의 심리적 붕괴와 외부의 시선을 다룬다. 박 예술감독이 말하는 동시대성을 품은 대표작이다. 그는 “각종 성범죄가 지금도 계속 문제가 되는 이야기인 만큼 정면으로 다뤘다”고 말했다.
취임 이후 새 희곡 발굴에 공들인 것도 지금을 살아가는 관객에게 필요한 이야기를 찾기 위해서였다. 중단된 지 15년 된 희곡 공모를 부활해 작품성과 대중성을 함께 갖춘 90분 이상 장막 희곡을 골라냈다. 수상작은 이듬해 낭독공연으로 제작하고, 그중 대상작은 다시 그 이듬해 본공연으로 올리는 방식이다. 이렇게 탄생한 작품이 김주희 작가의 ‘역행기’다. 2024년 대상작으로 선정된 이 작품은 이달 13일까지 무대에 오른다. 기존 연극의 형식과 내용에서 벗어난 창작을 지원하는 ‘창작트랙 180도’도 신설했다.
흥행이 보장된 고전을 무대에 올리는 게 더 쉬운 길 아니냐는 질문에 그는 작품성과 흥행성을 서로 다른 가치로 보지 않는다고 했다. “수많은 상업극이 있지만 모두 잘되는 건 아니죠. 대본 속에 얼마나 보편성이 담겨 있는지가 작품성과 흥행을 결정합니다.”
박 예술감독은 지난해 ‘헤다 가블러’와 ‘태풍’을 연출하기도 했다. 요즘 그가 특히 관심 있게 들여다보는 건 20~30대의 정서다. 그는 “무기력하다고 평가받는 젊은 세대를 그렇게 만든 근원이 무엇인지 궁금하다”며 “그런 정서를 건드리는 작품을 개발하고 싶다”고 말했다. “한국 연극의 매력, 세계에 알려야죠”국립극단의 역할을 국내에만 한정하지 않은 것도 박 예술감독이 이끈 변화 중 하나다. 그는 “국내 최고의 극단을 지향한다면 글로벌 관객을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적극적인 해외 교류에 나선 배경을 설명했다. 취임 직후 국립극단 내부에 국제교류 전문 기획자를 두고 해외 극장과 연극제 관계자를 명동예술극장에 초청해 국립극단의 작품을 직접 보게 했다. 해외 관객을 염두에 둔 작품 제작에 공을 들였다.
2025년 국립극단이 무대에 올린 연극 ‘헤다 가블러’는 싱가포르 국제예술축제(SIFA) 예술감독이 한국에서 공연을 본 뒤 현지 초청이 결정됐다. 정세영 연출의 ‘당신이 날 볼 수 없다는 것만 빼면’(2025)은 독일 켐니츠 연극제에 초청받았다. 현재까지 중국 싱가포르 독일 프랑스 등 해외 공연 6건이 확정됐다.
박 예술감독은 이를 ‘파종’에 빗댔다. 아직 한국 연극이 해외에 널리 알려진 단계는 아니지만, 먼저 완성도 높은 작품을 만든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이 지식재산권(IP) 수출로 나아가는 첫걸음이라는 설명이다. 무대에 내세운 ‘인간의 존엄’박 예술감독이 동시대 주변부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여 온 역사는 깊다. 1996년 극단 사다리 상임연출, 2001년 극단 풍경 대표를 거치며 ‘철로’ ‘하녀들’ ‘이영녀’ 등 사회 외곽의 삶을 조명하는 작업을 꾸준히 이어왔다. 이런 시선의 바탕에는 고(故) 김민기 학전 대표와의 대화가 있었다. 왜 연극을 하려고 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사회 주변부에 놓인 사람들의 목소리를 내고 싶다”고 답했다. 그에게 소외된 인물도 저마다의 욕망과 존엄을 지닌 주체였기 때문이다. 내년 4월 국립극단의 임기를 마친 뒤에도 박 예술감독은 연극인으로 살아갈 생각이다. “언젠가 정치·사회적으로 명확히 규정하기 힘든 ‘경계인’을 다루고 싶어요. 그들을 통해 지금 우리의 이념 대립이 과연 필요한 것인지 질문해 보고 싶습니다.”
최한종 기자 onebel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