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논설실] “나랏빚 감당 가능” 자신하는 정부…평가는 시장이 한다.

입력 2026-09-09 18:00
[여기는 논설실] “나랏빚 감당 가능” 자신하는 박홍근…평가는 시장이 한다.

적자성 채무 2030년 1312조, 이자비용만 53조
美·日 국채에도 시장은 비싼 금리 요구
안전자산도 공짜 돈 시대 끝나
'국가 CFO' 자처하는 박홍근 예산처 장관
재정수장 역할은 ‘낙관’ 아닌 ‘최악 시나리오’ 대비

“빚은 당장 그 규모나 속도만 보는 게 아니라 감당할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하지 않겠나.”
박홍근 기획예산처 장관이 2030년 적자성 채무가 1312조3000억원으로 불어나는 데 대해 “중장기적으로 충분히 관리 가능하다”면서 한 발언이다. 한국의 일반정부 부채(D2)가 국내총생산(GDP)의 54.4%로 국제통화기금(IMF) 선진국 평균 108.2%의 절반 수준이라는 게 근거다. 국가부채는 결국 GDP가 얼마나 커지느냐가 중요하다고도 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문제는 그 말을 누가 하느냐다. 박 장관은 스스로를 “대한민국의 최고채무책임자(CFO)”라고 불렀다. 지난 7월 열린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대한민국의 재정 CFO라는 사명감으로 대체불가 대한민국을 위한 2027년도 예산안과 중기 재정운용 방향을 마련하겠다”고 했다. 역대 경제부총리와 재정 수장의 별칭은 ‘곳간지기’였다. 정치권이 돈을 쓰자고 할 때 성장률과 세수 전망이 빗나갈 경우까지 계산해 제동을 거는 자리다.
국가 CFO가 지금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고 자신한 배경을 따져보자. 정부 전망대로라면 국가채무는 내년 1519조원에서 2030년 1734조원으로 늘어난다. 이 가운데 세금으로 갚아야 할 적자성 채무는 내년 1117조원에서 2030년 1312조원으로 불어난다. 국가채무 이자비용도 올해 36조5000억원에서 내년 42조8000억원, 2030년 53조3000억원으로 늘어난다.
당장 내년에 시장에서 소화해야 할 국고채 물량만 222조8000억원 규모다. 세수 호황 덕분에 올해보다 2조9000억원 줄었다. 하지만 적자를 메우기 위한 적자국채는 100조1000억원어치다. 만기상환 물량도 110조7000억원어치에 달한다.
정부가 감당할 수 있다고 해서 시장이 싼값에 돈을 빌려주는 것은 아니다. 지난 8일 한국 국고채 10년물 금리는 연 4.401%, 30년물은 4.635%에 마감했다. 재정경제부는 “장기금리가 너무 많이 오르고 있다”며 내년 초장기채 발행 비중 조정 가능성까지 거론했다.
세계 국채시장은 더 심상치 않다. 미국 10년 만기 국채금리는 최근 연 4%대 후반까지 치솟았다. 일본 10년물은 이달 연 3%를 돌파해 1996년 이후 30년 만에 최고 수준에 올라섰다. 국가부채가 GDP의 두 배를 넘는 일본에서 금리 상승은 곧바로 재정의 이자 청구서가 된다. 기축통화국조차 예외가 아니다. 물가가 높고 국채 공급이 늘며 재정에 대한 의구심이 커지면 시장은 더 높은 금리를 요구한다.
한국의 국고채 222조8000억원어치도 결국 시장에서 가격을 평가받는다. D2가 선진국 평균의 절반이라는 사실이 이자를 절반으로 줄여주진 않는다. 무엇보다 한국은 고령화에 따른 연금·의료·돌봄 지출과 AI·전력망·국방 투자가 동시에 밀려오고 있다.
정부의 자신감에는 물론 근거가 있다. 반도체 호황과 세수 급증으로 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은 올해 추가경정예산 기준 50.6%에서 내년 48.3%로 떨어질 전망이다. 2030년에도 국가채무비율을 49.0%로 관리하겠다는 게 정부 계획이다.

국가 CFO가 의심해야 하는 대목이 바로 이 지점이다. 반도체 호황이 예상보다 빨리 끝나면, 경상성장률이 낮아지고 세수가 전망을 밑돌면 어떻게 되는가. 국채금리가 높은 수준에서 장기간 머물면 53조원으로 예상한 이자비용은 어디까지 늘어나는가. CFO의 역할은 기준 시나리오를 설명하는 게 아니라 시장의 스트레스 테스트에 대비해 플랜B를 마련하는 것이다.
162조원 규모 미래대응기금도 마찬가지다. 정부는 호황기에 늘어난 세수를 미래 성장에 투자하겠다는 구상이다. 45조원을 청년·성장동력·지방·교육·인재 등에 쓰고 100조원이 넘는 자금을 여유자금으로 운용한다. 일부는 국채 신규 발행을 줄이는 데 사용한다.
미래를 위한 투자는 필요하다. 그러나 박 장관은 추가 세수로 “빚만 다 갚으면 나중에 정작 투자할 돈이 없다”고 말했다.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사업에도 기금을 쓸 수 있게 했다. “긴급한 재정 수요에 유연하고 신축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보완 장치”라고 설명했다. 재정수장이 ‘곳간지기’보다 투자자와 자금운용자의 역할을 앞세우는 셈이다.
국가 CFO라면 투자수익만큼 자금조달 비용을 따져야 한다. 100조원이 넘는 여유자금을 보유하면서 적자국채 100조원어치를 발행하는 구조가 최적의 자산·부채 관리인지, 대통령령까지 열어놓은 기금이 정치적 지출 요구를 얼마나 견딜 수 있는지도 검증해야 한다.
재정은 여력이 있을 때 지켜야 한다. 재정수장마저 “충분히 감당 가능하다”고 한다면 정부 안에서 누가 최악의 시나리오를 따질 수 있을까. 국가 CFO의 책무는 성장과 세수 전망이 빗나가고 금리가 올라도 재정이 버틸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정부는 “나랏빚을 감당할 수 있다”고 자신하지만, 평가는 시장이 한다. 이심기 수석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