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수력원자력이 원전의 소유와 운영을 그대로 맡으면서 기업이 앞으로 낼 전기료를 미리 받아 최대 15조원의 투자 재원을 마련하는 방안이 제시됐다. 기업은 선급금을 내는 대신 원전 전력을 10~15년간 원가에 가까운 가격으로 공급받고 발전비용과 가동 위험도 함께 부담하는 구조다. 프랑스가 도입한 원자력발전량 할당계약(CAPN)을 국내에 적용하자는 구상이다.
황재훈 K-정책금융연구소 부소장은 9일 국회에서 열린 ‘무탄소 PPA 확대와 전통산업 경쟁력 강화’ 토론회에서 국내 기존 원전 전력 50TWh를 기업에 15년간 할당하면 약 15조원의 선급금을 받을 수 있다고 추산했다. 토론회는 박정·안호영·김주영·박해철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김소희 국민의힘 의원, 접경지역내일포럼이 공동 주최했다.
CAPN은 일반적인 전력구매계약(PPA)처럼 계약 당시 가격을 장기간 고정하는 방식과 다르다. 기업이 계약 초기에 선급금을 내고 원전의 실제 발전비용에 연동된 가격으로 10~15년간 전력을 공급받는다. 원전 가동률이 떨어지거나 비용이 오르면 기업도 그 위험을 함께 부담한다.
원전의 소유권과 운영권, 안전 책임은 공기업이 그대로 갖는다. 국내에 도입할 경우 한국수력원자력이 원전을 소유·운영하면서 반도체와 철강, 석유화학, 데이터센터 기업에 발전량 일부를 장기간 배정하는 구조다. 황 부소장은 “CAPN은 싼 전력만 구매하는 것이 아니라 원전사업자와 동업하듯 비용과 위험을 나누는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프랑스는 국영 전력회사 EDF의 원전 전력을 규제가격에 공급하던 기존 원전전력 규제접속제도(ARENH)를 지난해 종료하고 CAPN을 확대하고 있다. ARENH가 EDF의 손실을 키우고 민간투자를 끌어내지 못했다는 판단에서다. CAPN에 참여한 기업의 선급금은 기존 원전의 장기운전과 설비 개선에 활용된다.
철강업체 아르셀로미탈과 시멘트업체 라파지, 데이터센터 기업 Data4, 배터리업체 베르코르 등이 EDF와 CAPN을 체결했다. 토탈에너지도 프랑스 정유·화학 사업장에 필요한 전력의 약 60%를 CAPN으로 조달할 예정이다.
황 부소장은 “원전에 대한 민간투자의 핵심은 기업에 원전 운영을 맡기는 것이 아니다”며 “공공 소유와 안전규제는 유지하면서 기업의 자본과 장기 전력 수요를 결합할 제도적 통로를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은 기자 hazz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