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임’에 질문을 던지며 공예와 순수미술의 경계를 허무는 전시가 열리고 있다. 서울 강남구 까사 로에베에서 진행중인 2026 로에베 재단 공예상 수상자 박종진 작가의 개별전 ‘Strata of Time: 시간의 층위’가 바로 그것.
도자는 화병이나 그릇, 항아리처럼 용도가 명확한 기물로 제작돼 왔다. 박종진은 이러한 익숙한 문법을 뒤집는 실험으로 쓰임을 넘어 도자의 미술적 조형이라는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한다.
2016년 제정된 로에베 재단 공예상은 전통 장인 기술의 계승과 재료·기법의 혁신성을 평가하는 세계적 권위의 현대공예상이다. 박종진은 세 번의 도전 끝에 최고상 영예를 안았다. 수상작 ‘착시의 층위(Strata of Illusion)’는 전 세계 5100여 점의 출품작을 제치고 단독 대상을 차지했다.
까사 로에베 특별전에서는 로에베 공예상 수상작을 포함해 박종진이 직접 큐레이션한 조각 및 평면 작업 20여 점도 함께 만나볼 수 있다. 전통적 도예가 지닌 물리적 한계를 벗어나 재료의 질감과 시간의 겹을 다채롭게 탐구한 작품들이다.
전시 병행 프로그램으로 열린 아트 토크 행사에서 작가는 “‘도자기는 그릇이다’는 명제를 깨고 싶었다"고 전했다. 작가는 도예에 새로운 기법을 활용했다. 종이를 사용하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그는 키친타올을 흙물에 묻혀 하나씩 쌓아 형태를 만들고, 가마 안에서 그 형태가 중력에 의해 무너지도록 둔다. 가마의 고온을 거치면 키친타올은 모두 다 타버리고 남는 것은 소성된 흙뿐이다. 작가는 이 과정을 ”도자기가 탄생하기 위해 종이는 반드시 소멸돼야 하는 존재가 된다“고 표현했다.
가마에서 나왔다고 끝이 아니다. 박종진의 도자는 그라인더로 표면을 갈고 다듬는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작품이 된다. 그라인더로 표면을 다듬는 작업이다. 작가는 ”보통 가마에 들어가면 끝이 나는 도예 작업 과정에서 한 발 더 나아가고 싶었다“며 ”어느 날 종이에 흙을 발라 구운 후 표면을 손으로 긁어 보니 엄청난 해방감과 함께 아예 다른 차원의 작업을 할 수 있겠다는 가능성을 봤다"고 지금의 작업 방식을 고안한 계기를 설명했다.
박종진 작가의 작품은 지난 5일 막을 내린 프리즈 서울 관객과도 만났다. 홍콩을 기반으로 활동해 온 솔루나 파인 아트에 출품된 그의 작품 세 점이 각각 약 800만원~5400만원(6천~4만 달러)에 판매됐다. 특히 VIP 데이인 2일 프리즈를 소유한 글로벌 엔터테인먼트 기업 MARI의 창립자 아리 이매뉴얼(Ariel Emanuel)이 이 중 한 점을 구매한 것으로 알려졌다.
작가는 터너상을 수상한 영국 도예가 그레이슨 페리를 언급하며 앞으로의 계획도 밝혔다. 그는 “영국에서 공부하는 동안 제 작품을 어디에 쓰는 것인지 묻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며 “도자를 기능적 기물이 아닌 예술적 표현의 매체로 확장한 그레이슨 페리를 보면서 새로운 시장의 가능성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이어 “앞으로 한국 공예에 대한 인식을 높이는 데도 힘을 보태고 싶다”고 덧붙였다. 전시는 9월 20일까지.
강은영 기자 qboo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