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수건을 오른손에 쥔 채 무표정하게 무대 중앙으로 걸어나온 19세 피아니스트가 피아노 앞에 앉았다. 합창석까지 관객이 들어찬 롯데콘서트홀의 분위기는 기대보다는 호기심에 가까웠다. 긴 기다림 끝에 김세현은 아주 담담하게 첫 소리를 띄웠다.
김세현은 2025년 프랑스 롱티보 국제콩쿠르 우승 이후 빠르게 국제무대에서 주목받고 있는 19세 피아니스트다. 현재 미국 뉴잉글랜드 음악원과 하버드대에서 음악과 영문학을 함께 공부하고 있으며, 최근 워너 클래식을 통해 데뷔 음반을 발표했다.
리사이틀의 첫 곡 슈베르트 소나타 18번은 작곡가 생애 후반에 쓰여진 깊이와 성숙함을 보여주는 중요한 곡으로 평가 받는 작품이다. 김세현은 1악장에서 담백하고 직선적으로 화음을 놓았다. 그리고 프레이즈가 지나치게 강조되거나 유연하게 들리도록 풀어가지 않았다. 마치 포장을 막 뜯은 새제품의 질감처럼 가공되거나 윤색되지 않은 소박함이 느껴졌다. 그래서일까, 첫 두 악장까지는 연주의 특별함은 무엇일지 잘 잡히지 않았다. 다만 귀가하는 길에 생각이 날 것 같은 담담한 여운 정도였다.
뉴잉글랜드 음악원에서 김세현을 지도하고 있는 백혜선 교수는 슈베르트 소나타 18번을 설명하며 김세현이 공부한 지 오래되지 않은 작품인데 곡을 습득하는 속도와 능력이 탁월했다고 말했다. 이미 학생이라고 말할 수 없을만큼의 본인만의 피아니즘을 가지고 있는 아티스트가 되었다고 평가했다.
3악장부터는 분명한 차이가 피부로 느껴졌다. 특히 악장 중간에 놓인 트리오 부분에서 피아니스트라면 누구라도 좀 더 자유롭게 선율을 강조하고 싶을 법한 순간에도 김세현은 그 선을 넘지 않았다. 프레이즈 자체의 아름다움을 부각하기보다 악장 전체의 분위기와 비례를 지켰다. 이를 표현의 ‘억제’가 아니라 ‘스스로 설정한 한계’라고 본다면, 연주자보다 작곡가가 보이는 연주를 하고 싶다는 그의 철학과 자연스럽게 맞닿는다. 4악장에서도 작품을 불필요하게 심각하거나 장대하게 부풀리지 않았다. 작은 음형들의 가벼움과 투명함을 살리면서도 음악의 품격은 놓치지 않았다. 작품이 요구하는 크기와 무게를 정확히 가늠하는 감각이 돋보였다.
2부 첫 곡 쇼팽의 ‘뱃노래’는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함보다 섬세한 음색과 내면의 서정이 중요한 작품이다. 김세현이 도입부의 왼손 아르페지오를 시작하자 마치 베네치아의 물 위에서 곤돌라가 고요하게 흔들리는 듯했다. 선율을 노래하는 오른손 못지않게 베이스와 여러 성부 사이의 공간을 만들어내는 왼손의 유려함이 탁월했다. 축구로 비유하자면 공이 발에 붙어 다니는 선수처럼, 손과 건반 사이에 거리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만큼 소리와 공간을 자유롭게 통제했다.
쇼팽의 12개의 연습곡 Op. 25는 피아노 음악사에서 가장 중요하고 혁신적인 작품 중 하나로 꼽힌다. 1번 곡은 앞서 연주한 ‘뱃노래’의 물결이 그대로 이어지는 듯, 빛나는 강물 위를 유영하는 감성적인 선율이 돋보였다. 쇼팽의 기교적 화려함과 대척점에 놓인 7번에서는 ‘음악을 앞세우는 피아니스트’로서 김세현의 정체성을 잘 보여줬다.
양손 옥타브가 거친 에너지를 뿜어내는 10번을 지나 ‘겨울바람’으로 널리 알려진 11번에 이르러서도 김세현은 난도의 극한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다. 임팩트 있는 칼군무로 시선을 압도하듯 기교를 과시하기보다, 음악의 흐름과 자연스러움을 놓치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을 과장하지 않는 그 태도 자체가 어느새 그의 가장 선명한 개성으로 다가왔다.
청중들의 환호가 이어지자 김세현은 무려 10곡의 앙코르를 선보였다. 단순한 서비스가 아니라 음반 발매 기념 리사이틀의 숨은 후반부에 가까웠다. 쇼팽(Chopin)과 포레(Faure)에서 아르보 패르트(Arvo Part), 샤를 트레네(Charles Trenet)까지 이어지는 앙코르에서 본 공연에서는 자기 자신을 앞세우지 않았던 피아니스트는 조금씩 19세다운 장난기와 여유를 드러냈다. ‘강아지 왈츠’로 알려진 쇼팽의 왈츠 Op. 64, No. 1을 마친 그는 웃으며 피아노 건반 뚜껑을 닫았다. 2시간 15분간 이어진 공연을 이끈 두 손을 가볍게 털며 무대 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한국의 젊은 피아니스트들의 흥미로운 것은 하나의 성공 공식으로 수렴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김세현 역시 이미 앞서 세계무대에 자리 잡은 한국 피아니스트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음악적 좌표를 만들어 가고 있다. 이번 리사이틀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틀을 깨지 않고도 새로울 수 있고, 선을 넘지 않고도 강렬할 수 있다는 것. 김세현의 절제된 피아니즘은 그 역설적인 힘을 보여줬다.
김동민 뉴욕클래시컬 플레이어스 음악감독·아르떼 객원기자<hr style="display:block !important; border:1px solid #c3c3c3" />
[프로그램 정보]
- Schubert Piano Sonata No. 18 in G major, D. 894
- Chopin Barcarolle in F-sharp Major, Op. 60
- Chopin Twelve Etudes, Op.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