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나가던 강남 병원 때려치우고 스타트업 합류한 65세 의사

입력 2026-09-08 08:00
수정 2026-09-08 08:18
기억이 잘 떠오르지 않던 어린 시절부터 엄마는 아팠다. 워낙 오래 병을 앓았기 때문에 가끔 아프다는 말을 해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부산에서 학창 시절을 보내고 서울대 의예과에 합격하면서 스무 살부터는 엄마를 볼 일이 잘 없었다. 핑계라면 의대 공부에 치여 살며 고향에 내려갈 시간이 없었다. 스무세 살 오랜만에 내려간 고향 집에서 엄마를 보고 깜짝 놀랐다. 20년 넘게 병마와 싸우던 엄마의 머리는 한 올도 남지 않고 완전히 빠져 있었다.

탈모·두피케어 브랜드 ‘리필드’를 운영하는 콘스탄트의 연구소장(CRO) 양미경 박사(65·사진)의 어린 시절 기억 한켠에는 머리카락을 모두 잃은 어머니의 모습이 남아 있다. 그가 훗날 탈모 치료에 뛰어든 데에도 이 기억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양 소장는 국내에서 탈모 치료·연구 분야에 가장 먼저 뛰어든 의사 중 한명이다.

양 소장은 최근 27년간 운영하던 병원을 접고 1989년생 30대 대표가 창업한 스타트업인 콘스탄트에 합류했다. 콘스탄트는 올해 2월 기준 아모레퍼시픽을 포함한 굴지의 뷰티 기업들로부터 총 120억원의 투자금을 따내며 주목받은 신생 기업이다. 이 회사의 주력 브랜드인 리필드는 두피에 화장품처럼 바르는 탈모 제품인 '헤어 토닉'을 판매한다.

양 소장의 병원은 강남 대치동에서 탈모 치료로는 제일 잘나가기로 손꼽히던 곳이었다. 남들은 은퇴를 고민할 나이다. 안정된 일터를 내려놓고 자신보다 서른 살 가까이 어린 창업자가 이끄는 스타트업을 택한 이유는 뭘까. 지난 7일 서울 마포구 콘스탄트 본사에서 양 소장을 만나 새로운 도전에 나선 이유를 들었다.

양 소장의 본래 전공은 탈모가 아니다. 방사선종양학을 전공하고 서울대병원에서 15년간 암 환자를 치료했다. 중증 환자가 많은 과 특성상 치료의 주 방향이 환자의 생명을 하루라도 더 연장하는 데에 있었다.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된 계기는 대학병원 근무 막바지에 만난 39세 말기 뇌암 환자였다. 항암 치료를 하던 중간에 환자의 어머니가 찾아왔다.

“30대가 다가도록 미국에서 공부만 하다가 돌아온 아들이 받아든 게 뇌암 말기 진단이라며 한참을 울던 어머니가 치료 중단을 요청했습니다. 아들이 마지막 삶을 온전히 누릴 수 있게 해달라면서요. 담당 교수님들께 혼날 걸 알면서 그날 바로 퇴원 조치하고 집에 보내줬어요. 항암을 하느라 머리카락이 빠져 두피가 훤히 드러난 환자의 머리를 보면서 평생 병마와 싸우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떠올랐거든요.”

“의사가 어떻게 치료를 포기하느냐”는 질책이 쏟아졌다. 그 일을 계기로 양 소장은 자신이 원하는 의사의 역할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했다. “생명을 연장하는 일은 저보다 훨씬 뛰어난 교수님들이 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 다음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표를 던졌다. “무엇을 해볼까 고민하다가 탈모 치료가 떠올랐어요. 그간 만나온 환자들은 물론 어린 시절 엄마의 모습이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 생각해요.” 탈모가 치료해야할 질병이라는 인식조차 없던 시절이었다.

병원은 잘 됐다. 한번이라도 병원을 방문한 환자들은 같은 고민을 하는 주변 사람을 꼭 소개시켜줬다. “서울 전역은 물론 지방이나 제주, 심지어 해외에서도 환자가 찾아왔어요. 탈모 치료와 모발이식을 함께 묶은 체계를 만들고 레이저 치료 등을 도입하며 다방면으로 탈모를 진료하고자 했지만 환자를 오래 볼수록 쓸 수 있는 치료 수단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갈증이 생겼어요. 결국 탈모를 해결할 수 있는 물질을 개발해보고자 하는 꿈이 생겼죠.”


그렇게 시작한 연구는 수년간 이어졌다. 양 소장이 주목한 것은 모발의 성장 주기였다. “정상적인 모발은 성장기와 퇴행기, 휴지기를 반복하는데 탈모가 진행되면 성장기가 짧아지면서 머리카락이 충분히 굵고 길게 자라기 전에 빠집니다. 성장기를 유도하면서 퇴행기 진입을 늦출 수 있는 물질을 찾기 시작했죠. 수많은 논문을 뒤지고 실험을 반복한 끝에 주목한 것이 세포 내 칼슘 신호와 관련된 ‘사이클릭 ADPR’이었습니다.” 양 CRO는 이 물질이 모발 성장에 관여하는 신호를 활성화하고 성장 주기에 영향을 줄 가능성을 확인하고 관련 특허를 냈다. 이후 연구를 이어가며 논문도 발표했다.

사업화 제안이 쏟아졌다. “초대형 화장품 업체부터 제약사, 글로벌 유통망을 가진 회사들까지 여러 대기업이 관심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번번이 제안을 거절했다. “대부분은 물질 자체보다 ‘의사가 만들었다’는 스토리나 판매망에 관심이 많았어요.”

그러던 어느 날 병원에 한 환자가 찾아왔다. 정근식 콘스탄트 대표(CEO)다. 콘돔 브랜드 사업을 하던 정 대표는 탈모 상담을 받으러 병원을 찾았다가 양 소장이 개발한 제품을 접했다. 한두 달간 직접 사용한 뒤 다시 찾아와 사업화를 제안했다. 늘 그랬듯 처음에는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정 대표는 다른 제안자들과 달랐다. 제품을 어떻게 팔 것인지보다 “왜 이 물질이 모발 성장에 관여하는지”부터 물었다. 설명을 듣고 돌아간 뒤 다음 진료 때는 관련 내용을 공부해 와 더 깊은 질문을 던졌다.

“내게 사이클릭 ADPR은 자식 같은 존재였어요. 무작정 장사를 잘 할 수 있는 곳보다 제대로 이해하고 키워줄 사람에게 맡기고 싶었습니다.” 두 사람이 손잡고 만든 헤어케어 브랜드가 바로 리필드다. 리필드는 현재 미국·영국·호주·홍콩 등 10개국에서 탈모케어 제품을 판매 중이다. 2023년 연 매출 12억원, 2024년 30억원, 지난해 120억원에 이어 올해는 300억 원을 향해 달리고 있다.

“의사로 40년 가까이 살았어요. 환갑을 넘어서면서 동료들은 하나둘 은퇴하기 시작했어요. 일할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을 것이라 생각해요.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안 가본 길에 써보고 싶습니다.” 목표는 리필드를 헤어케어 브랜드를 넘어 탈모 치료 의약품을 개발하는 회사까지 키우는 것. “제가 만든 ‘자식’이 어디까지 자라는지 끝까지 보고 싶습니다.”

안혜원 기자 anh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