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와 전력망 투자가 급증하면서 구리 가격이 고공행진하고 있다. 구리를 핵심 원료로 쓰는 전선 가격도 뛰면서 전기 공사부터 공장 설비까지 산업계 전반의 원가 부담으로 번지고 있다. 이전까지 철근과 시멘트가 건설비 상승의 주요 원인이었다면 이제 건물에 들어가는 전선과 케이블이 공사비를 밀어 올리는 핵심 변수로 떠올랐다. ◇ 국내 전기동 가격 역대 최고6일 가격정보플랫폼 한경프라이스에 따르면 지난달 기준 국내 전기동 가격은 t당 2107만8000원이다. 지난해 11월보다 35.1%, 올해 1월보다 18.9% 올랐다. 지난 7월 t당 2157만5000원으로 역대 최고 수준까지 치솟는 등 두 달 연속 2100만원을 웃돌았다.
한국비철금속협회에 따르면 지난 3일 런던금속거래소(LME) 구리 현물 가격은 t당 1만4359달러였다. 최근 기록한 사상 최고치인 t당 1만4527.5달러와 불과 1% 차이다. 1년 새 45% 이상 올랐다. 미국의 관세 정책을 앞두고 구리가 미국으로 몰린 데다 광산·제련소 공급 차질까지 겹친 영향이다.
구리값 상승은 전선 판매가격을 끌어올리고 있다. 전선은 원가에서 전기동과 알루미늄 등 원재료가 차지하는 비중이 70~80%에 달한다. LS전선의 올 상반기 국내 전기동 평균 매입가는 t당 2000만1000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39.2% 상승했다. 이 기간 전선 중간재인 나동선 내수 판매가격은 t당 1453만7000원에서 2110만8000원으로 45.2% 뛰었다.
구리 수요는 중장기적으로 더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세계 데이터센터 전력 소비량이 2030년 약 945TWh로 2024년의 두 배 이상이 될 것으로 전망했다. S&P글로벌은 AI 데이터센터와 전력망, 전기차 등의 수요 증가로 세계 구리 소비가 2025년 약 2800만t에서 2040년 4200만t으로 50% 늘어날 것으로 내다봤다. 신규 광산 투자가 따라가지 못하면 2040년 공급 부족분이 연간 1000만t에 이를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 AI·전력망 투자 확대…비용 압박문제는 전선 가격 상승이 전선업체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반도체 공장과 배터리 공장, 데이터센터 등 전력을 많이 사용하는 시설일수록 케이블과 배전설비 투입량이 많다. 수개월 전 공사비를 확정한 건설·전기공사업체는 원자재값 급등분을 발주처에 전가하지 못할 경우 수익성 악화를 떠안을 수 있다. 원재료 확보에 더 많은 돈이 묶이면서 전선업체의 운전자금 부담도 커졌다.
공공 발주처도 계약가격 조정에 나섰다. 한국전력은 지난 5월 전선업체가 요청한 물가 변동분 26건을 검토해 계약금액을 총 140억원 늘렸다. 원자재 수급 차질이 우려되는 전선의 납기도 30일 연장했다. 원자재 급등이 단순한 가격 문제가 아니라 전력망 구축 일정까지 흔들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업계에서는 구리 가격 상승세가 장기화할 경우 전선업체를 넘어 건설·전기공사 등 산업 전반의 비용 부담이 커질 것으로 보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원자재 가격 상승이 장기화하면 전선업체뿐 아니라 수요 산업 전반의 설비 투자 비용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권용훈 기자 fac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