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같은 미술 작품도 어떤 도슨트의 해설을 듣느냐에 따라 감상의 깊이가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건조한 설명은 기억 속에서 쉽게 증발하지만, 생생한 작품 속 이야기는 관람객의 마음속에 깊이 머문다.
지난 4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 오디토리움에서 열린 '키아프 클래식' 무대에 오른 피아니스트 조성진은 이날 하루 '클래식 음악 도슨트'가 된 듯 청중을 쇼팽의 음악 세계로 깊이 빠져들게 했다. 이날 그가 연주한 곡은 앙코르 한 곡을 포함해 총 15곡. 이중 드뷔시와 슈만, 요한 슈트라우스 2세 작품을 제외한 12곡 모두 쇼팽 작품으로 채워졌다. 조성진은 2015년 쇼팽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한 쇼팽 스페셜리스트답게 쇼팽의 매력을 극대화하는 선곡과 작품 배치로 청중의 귀를 사로잡았다.
이날 공연은 한국화랑협회가 주최하는 국내 최대 규모 아트페어 '키아프 서울'이 관람객의 예술 경험을 확장하기 위해 마련한 특별 무대였다. 첫 곡은 쇼팽의 녹턴(야상곡)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번호 9번의 두 번째 곡이었다. 조성진의 손끝에서 익숙한 선율이 펼쳐지자 금요일 저녁 피로에 지친 관객들 위로 포근한 이불이 감싸 안는 듯한 온기가 감돌았다.
이어 각기 다른 매력의 왈츠 아홉곡이 1부를 채웠다. 조성진은 단조 작품인 쇼팽의 왈츠 7번과 3번을 연이어 연주하며 깊어가는 어느 가을날의 풍경화를 떠올리게 하더니, 이내 경쾌한 왈츠 5번으로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왈츠 5번의 맑은 고음부를 연주하는 조성진의 입가엔 살며시 미소가 걸리기도 했다.
1부에서 조성진은 충분한 루바토(박자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연주)로 쇼팽 특유의 낭만성을 극대화했다. 공연 초반엔 페달을 밟는 소리가 둔탁하게 울려 퍼지기도 했지만, 이를 감지한 조성진은 노련한 테크닉으로 페달링을 섬세하게 조절하며 깨끗한 음색을 구현해냈다.
2부는 하이라이트의 연속이었다. 조성진은 건반에서 마치 하프 선율이 흘러나오는 듯한 드뷔시의 '달빛'에 이어 쇼팽의 스케르초 2번과 폴로네이즈 '영웅' 등을 선보였다. '영웅'은 조성진에게 쇼팽 콩쿠르 우승과 함께 폴로네이즈상을 안긴 곡으로, 조성진 특유의 섬세함과 에너지가 완벽한 균형을 이루며 장내를 압도했다.
앙코르곡으로 슈만의 '트로이메라이'를 들려준 그는 관객들에게 아늑하고 깊은 여운을 남긴 채 무대를 떠났다.
허세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