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영도 다이소도 아니었다…月 10억 버는 외국인 '쇼핑 성지'

입력 2026-09-04 17:52
수정 2026-09-04 18:30

2016년 9월 뉴욕타임스는 프랑스 파리 5구의 한 약국을 기사로 다뤘다. 주인공은 ‘파마시 몽쥬’(몽쥬약국). 외국인 손님의 70% 이상이 화장품을 사러 온 한국인이고, 약국은 한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직원 12명을 배치했다. 루브르 박물관은 건너뛰어도 몽쥬약국은 들르던 시절이었다.

10년이 지난 지금 서울 명동의 대형 약국은 외국인 응대 직원을 10여 명씩 두고 있다. 몰려든 외국인 관광객이 연고, 재생크림 등을 박스째 사 간다. 한국형 몽쥬약국이 수십 곳 생긴 것이다.


4일 유통업계에 따르면 관광·뷰티 특화 약국인 도레미약국이 이달 서울 강남역 11번 출구 앞에 문을 연다. 파리바게뜨와 뉴발란스가 차례로 영업한 강남대로 핵심 상권이다. 길 건너엔 300㎡대 매장에 개방형으로 약을 진열한 레디영약국이, 인근엔 맞춤형 상담을 결합한 옵티마웰니스뮤지엄(OWM)이 있다. 뷰티업계 관계자는 “이들 약국은 처방전을 내주는 병원이 아니라 관광객 동선을 따라 입지를 정한다”고 말했다.

서울 대표 관광 상권인 명동의 신규 개설 약국 수는 2024년 2곳에 불과했지만 올해 1~8월엔 19곳에 달했다. 지난해 9월 명동에 레디영과 베리뉴약국이 동시 개점한 뒤 1년 새 60여 곳으로 늘었다. 레디영 약국은 점포 10곳, OWM은 9곳을 내며 몸집을 불렸다. 일부 뷰티 특화 약국의 월 매출은 10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뷰티 수요를 약국과 결합하려는 시도는 27년 전에도 있었다. 1999년 서울 신사동에 1호점을 낸 CJ올리브영이 매장 안에 약국을 들였다. 코오롱의 W스토어와 GS리테일 왓슨스, 이마트의 분스와 부츠 등이 실험을 이어갔지만 지금은 대부분 사라졌다. 올리브영만 약을 떼어내고 뷰티 편집숍으로 갈아타 살아남았다.

유통 대기업이 연달아 실패한 사업이 최근 외국인 수요에 힘입어 확대되고 있다. 뷰티 편집숍의 진열 노하우와 마케팅 방법론을 약국이 그대로 흡수했다. 백화점과 면세점, 올리브영에 이은 새로운 K뷰티 스토어의 탄생이다.왓슨스도 실패한 드러그스토어…뷰티 입은 K약국이 해냈다
병원 대신 올영 옆으로 간 약국, 외국인 성지로
서울 지하철 2호선 성수역 4번 출구. 횡단보도를 사이에 두고 초록색 ‘올리브영N 성수’와 파란색 ‘레디영약국’ 간판이 마주 보고 있다. 올리브영N은 5개 층의 초대형 뷰티 매장이다. 맞은편에 있는 약 170㎡ 규모 레디영약국에도 피부 진단기와 외국어 안내판이 놓여 있다. 관광객은 두 곳을 오가며 상품을 비교한다. 올리브영에서 마스크팩을 산 뒤 약국에서 여드름 치료제를 고른다. 두 점포는 경쟁자인 동시에 서로 고객을 불러주는 관계다. 약국이 외국인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뷰티 플랫폼으로 진화하면서 생겨난 풍경이다.◇약국 매출 80% 화장품서 나와4일 유통업계에 따르면 무신사가 오는 11일 여는 초대형 뷰티 매장인 ‘무신사 뷰티 홍대’ 건물 지하 1층에 약국 체인 온누리H&C의 뷰티온누리약국 1호점이 들어선다. 무신사가 처음으로 여는 지상 3층 규모의 오프라인 뷰티 점포에 관광객용 약국 체인이 따라붙는 것이다.

조제에 특화한 일반 약국은 보통 병원 옆에 있다. 이와 달리 관광·뷰티 특화 약국은 뷰티 편집숍 옆에 들어서는 출점 전략을 편다. 외국인 관광 동선에서 뷰티숍이 취급하기 어려운 일반의약품과 약국 전용 제품을 판다. 서울 명동의 한 대형 약국 약사는 “외국인은 약국 제품을 올리브영 상품보다 더 검증된 것으로 인식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명동과 홍대, 성수 등에서 레디영 간판을 단 약국 점포는 각기 다른 약사가 개설한 독립 사업체다. 주식회사 레디영이 이들 약국에 브랜드와 상품 기획을 제공한다. 업계에서 추산하는 일반의약품 마진율은 9~15% 수준. 약국 전용 더마(기능성) 화장품은 이보다 훨씬 높은 30~40%다. 핵심 상권의 비싼 임차료도 기꺼이 감당하는 이유다.

과거 의료 관광이 한 차례 성형수술에 큰돈을 쓰는 것이었다면 지금은 레이저 시술을 받고 약국에서 케어 제품을 산다. 약국 화장품도 단순 보습제 수준에서 PDRN, 엑소좀 등 피부과 성분이 들어간 크림과 세럼으로 진화했다. 업계에선 뷰티 특화 약국 매출의 70~80%가 기능성 화장품에서 나오는 것으로 추정한다.◇1세대 드러그스토어 잔혹사 2000년 의약분업 직후 약국 화장품 붐이 일었다. 당시 로레알과 LG생활건강, 참존 같은 화장품업체부터 중외제약 등 제약사까지 화장품에 도전장을 내며 경쟁했다. 하지만 개별 약국과 일일이 계약해야 하는 한계를 넘지 못했다. 의약분업 체제가 자리 잡고 조제 매출이 안정되면서 약국도 화장품을 굳이 들여올 유인이 사라졌다. “약사들이 처방약 조제에 매몰돼 제품 상담력을 상실했다”는 비판이 나온 시절이다.

이보다 한발 앞서 대기업 CJ도 드러그스토어 사업에 도전했다. 1999년 11월 올리브영 1호점을 열면서 매장 안에 약국을 배치했다. 의약품과 화장품, 건강식품을 한곳에서 파는 모델이었다. 당시 올리브영은 주변에 병원이 있는지를 따졌다. 처방전을 들고 온 환자가 화장품을 함께 구매하는 수요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이후 코오롱의 W스토어, GS리테일과 홍콩 AS왓슨이 합작한 왓슨스, 신세계의 분스와 부츠가 차례로 시장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화장품은 유통회사가, 의약품은 약사가 관리해야 한다는 한계가 컸다. 일부 점포에선 약사와 기업 간 운영 주도권을 두고 마찰이 빚어졌다. GS왓슨스 관계자는 2011년 당시 “약국의 고객 유입 효과가 없었다”고 했다. 올리브영은 가장 먼저 답을 바꿨다. 의약품 중심의 일본형 드러그스토어를 포기하고 뷰티 편집숍으로 전환했다. 의약품 대신 인디 화장품을 발굴하고 전국 단위 상품 기획과 마케팅, 멤버십 데이터를 확보했다.◇올리브영 ‘유통 문법’ 흡수1세대 드러그스토어 모델이 실패하는 사이 일부 약국은 프랜차이즈 사업으로 유통 노하우를 쌓았다. 약국 체인 온누리는 올리브영보다 8년 이른 1991년 시작됐다. 현재 전국 체인 약국은 모두 5405곳. 뷰티 붐이 일자 온누리는 ‘뷰티온누리약국’, 옵티마는 ‘옵티마웰니스뮤지엄’라는 별도 프랜차이즈를 냈다.

약사가 창업한 약국 전용 뷰티업체 닥터리쥬올은 PDRN 등 설명이 필요한 성분을 앞세웠다. 올리브영에 제품을 선보이는 대신 약국에 공급해 대표 제품 판매량을 끌어올렸다. 올리브영과 뷰티 특화 약국이 서로의 경쟁력을 흡수하면서 새로운 시장이 생겨났다는 분석도 나온다. 약국이 올리브영의 문법인 셀프 진열과 편집숍 구성을 베끼는 동안 올리브영은 약국의 문법인 상담과 피부과학 전문성을 키웠다는 얘기다.

고은이/장서우 기자 kok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