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정경제부가 한국전력과 삼성전자·SK하이닉스 사이의 25조원 규모의 전기료 선납 거래를 주선·설계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전을 관할하는 기후에너지부 등이 아닌 재정경제부가 이를 제안한 것은 불어나는 한전채가 채권시장 자금을 빨아들이는 '구축효과'를 막기 위한 조치다.
4일 관계부처와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한전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전기요금 선납을 요청하는 방안을 마련하는 과정에 재경부 국고라인이 관여했다. 지난 7월 한전과 두 회사 관계자들 면담 과정에 황순관 재경부 국고실장과 황희정 재경부 전 국채정책과장(현 국제금융과장)들도 참석했다. 황순관 실장은 이에 대해 "채권시장 수급 관리를 위한 만남이었다"고 설명했다.
이번 거래는 이들 재경부 국고라인과 박정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이 주선 및 설계를 맡았다. 한전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각각 20조원, 5조원에 달하는 전기요금을 선납할 것을 제안했다. 지난해 삼성전자(약 4조1000억원)와 SK하이닉스(약 9000억원)가 납부한 전기요금을 기준으로 5년 치에 해당하는 요금이다.
재경부가 거래에 나선 직접적인 배경은 불어날 것으로 관측되는 한전채 물량이다. 한전의 부채는 올 상반기 기준 210조7160억원에 달했다. 이자 비용으로만 하루에 115억원을 지출 중이다. 용인·호남 반도체 클러스터와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등에 전력을 공급하기 위한 송·변전망 투자도 확대해야 한다.
한전의 나빠지는 재무구조에 대응해 한전채 물량이 쏟아질 것이라는 우려가 채권시장에 번지고 있다. 지난 6월말 한전채 발행잔액은 70조원을 웃돈다. 재경부가 우려한 것은 2022년 상황의 재연이다. 당시 한전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따른 에너지 가격 급등과 제한적인 전기요금 인상으로 대규모 적자를 내자 한 해 동안 한전채 37조2000억원어치를 발행했다. 한전채 물량이 쏟아지면서 상대적으로 신용등급이 낮은 일반 회사채와 여신전문금융회사채는 투자 수요를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한국은행이 당시 기준금리를 연 1.25%에서 연 3.25%로 빠르게 올린 영향까지 겹치면서 채권시장 전반이 얼어붙었다.
한은은 올해도 지난 7월과 8월 기준금리를 연속으로 인상해 연 3.0%로 끌어올렸다. 시장금리가 높아진 상황에서 전력망 투자와 차환 수요가 겹치면서 한전채가 회사채시장의 자금을 다시 빨아들일 수 있다는 우려가 채권시장에 퍼졌다.
전기요금 선납 거래가 마무리되면 한전이 자금을 확충하면서 한전채 발행 유인도 약화할 전망이다. 그만큼 한전채가 일반 회사채의 투자 수요를 밀어내는 구축효과가 줄어든다. 채권시장에서는 재경부가 이번 만남을 통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국채 매입 가능성을 타진한 것으로 알려졌다. 별도재무제표 기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현금·현금성자산 및 단기금융상품 등은 각각 44조8000억원, 36조5000억원으로 나타났다. 반도체 호황으로 현금 창출력이 커진 두 회사가 국채시장의 새로운 수요 기반으로 부상할 수 있다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김익환 기자 lovep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