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전닉스에 25조 손 벌린 한전…전력망 투자 이대로 괜찮나 [여기는 논설실]

입력 2026-09-04 06:00
수정 2026-09-04 06:28


한국전력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내민 ‘25조원 청구서’가 논란이다. 삼성전자 20조원, SK하이닉스 5조원. 지난해 납부액을 기준으로 향후 5년치에 해당하는 전기요금 25조원을 미리 내달라는 요청이다. 지난해 두 회사가 낸 전기요금이 각각 4조1000억원, 9000억원이니 얼추 5년치다. 210조원이 넘는 빚에 눌린 한전이 급기야 반도체 호황으로 현금 여력이 커진 삼전닉스의 금고에 손을 벌리는 모양새다. ◆“딜 구조는 나쁘지 않은데…”
딜의 구조를 뜯어보면 ‘나쁜 거래’는 아니다. 공짜로 돈을 달라는 게 아니다. 한전이 제시한 금리는 국고채 금리에 연 0.15%포인트를 얹은 수준으로 알려졌다. 대략 연 3%대 중반이다. 이자를 현금으로 지급하는 대신 6개월 단위로 계산해 앞으로 낼 전기요금에서 빼주는 방식이다. 두 회사가 5년치를 한꺼번에 송금하는 것도 아니다. 현재 거론되는 방안은 약 1년에 걸쳐 선납하고 매달 발생하는 전기요금을 잔액에서 차감하는 방식이다.

한전으로서는 한전채보다 낮은 비용으로 자금을 조달하면서 채권 발행 부담을 덜 수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도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다. 어차피 낼 전기요금을 먼저 내고 당장 사용하지 않는 현금 일부를 국고채보다 높은 수익률로 굴리는 효과를 얻는다. 이자를 전기요금 할인으로 받지만 막대한 전기를 계속 사용할 두 회사에는 현금과 크게 다를 게 없다.

선납금은 용인과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 등에 필요한 전력망을 구축하는 데 사용된다. 수십조원을 들여 첨단 팹을 지어도 송전선과 변전소가 제때 들어오지 않으면 공장을 가동할 수 없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로서는 전력망 지연에 따른 위험 부담을 덜 수 있다. 한전이 이 거래를 ‘윈윈’이라고 보는 이유다.

◆여전히 남는 한전의 '체력 고갈' 문제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에 필요한 전력은 향후 15GW까지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의 팹 4기에도 약 6.3GW가 필요하다. 두 곳만 21GW가 넘는다. 여기에 AI 데이터센터의 전력 수요까지 더해진다. 송전선과 변전소도 있어야 한다. 한전의 제11차 장기 송·변전설비계획에 따르면 2038년까지 투자액은 72조8000억원으로 2년 전보다 16조3000억원 늘었다. 메가클러스터와 AI 데이터센터 수요까지 반영하면 투자 규모는 더 커질 수밖에 없다.

문제는 한전의 ‘체력’이다. 지난 6월 말 한전과 발전자회사 연결 부채는 210조7000억원이다. 차입금만 133조3000억원이고 상반기 이자비용이 2조1000억원이다. 하루 115억원꼴이다.

게다가 한전의 자금 조달 여력에도 제약이 커지고 있다. 에너지 위기 때 한전채 발행 한도를 자본금과 적립금의 5배까지 늘려준 특례도 내년 말 끝난다. 미래 전기요금을 당겨 쓰자는 아이디어는 새로운 전력망 금융기법이면서 동시에 한전의 빠듯한 재무 사정을 반영한다. ◆삼전닉스의 ‘역순환금융’ 해석도AI 경쟁의 병목은 반도체를 넘어 전력으로 이동하고 있다. 데이터센터와 첨단 팹이 요구하는 전력량이 급증하면서 미국 빅테크는 발전소와 전력망 확보에 직접 나서고 있다. 한국도 AI와 반도체를 국가 성장전략의 중심에 놓고 수백조원 규모의 메가프로젝트를 추진한다. 문제는 전력 인프라를 책임질 한전이라는 ‘공룡 공기업’에 210조원이 넘는 부채가 쌓여 있다는 점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고민도 팹에 투자하는 것을 넘어 국가 전력망 건설에까지 ‘선(先)투자’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는 데 있다. 전력망을 빨리 확보할 수 있다면 합리적인 경영 판단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과연 이런 방식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느냐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다.

이번 거래를 엔비디아의 ‘순환금융(circular financing)’에 빗대 해석하는 시각도 있다. 엔비디아가 AI 클라우드와 데이터센터 사업자인 고객에게 돈을 대고, 그 투자가 다시 GPU 수요로 돌아오는 구조라면 이번에는 돈의 방향이 거꾸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라는 고객이 공급자인 한전에 돈을 먼저 대고, 한전은 그 돈으로 두 회사가 사용할 전력망을 건설한다. 일종의 ‘역(逆)순환금융’인 셈이다.

딜의 구조는 다르지만, AI 인프라에 들어가는 돈이 천문학적으로 불어나면서 공급자와 고객이 서로의 투자자 역할까지 떠맡게 됐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엔비디아가 GPU를 팔기 위해 고객의 데이터센터 금융까지 챙긴다면, 삼전닉스는 반도체를 만들기 위해 전력망 금융까지 걱정해야 하는 시대가 됐다.

◆‘보이지 않는 손’ 작용하나
정부가 논의 과정에 등장한 것도 민감한 이슈다. 지난 7월 재정경제부 관계자와 한전, 삼성전자·SK하이닉스 관계자들이 이 문제를 논의했고 청와대에도 보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기업이 경제성을 따져 자발적으로 참여한다면 문제될 게 없다. 그러나 국가 프로젝트라는 이유로 거절하기 어려운 거래가 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미래 전력수요가 확실한 기업이 돈을 먼저 내고, 한전은 조달비용을 낮춰 필요한 인프라를 앞당겨 건설하는 방식은 새로운 전력망 금융 모델이 될 수도 있다. 전력망 건설을 국가 재정이나 한전채에만 의존해야 한다는 법도 없다.

한전의 ‘25조원 선납’ 제안은 AI 시대의 전력망과 반도체라는 두 개의 거대한 퍼즐을 맞추는 창의적 금융 해법이 될 수 있을까. 이번 거래가 던지는 진짜 질문은 5년 뒤 받을 전기요금을 당겨 써서라도 지금 전력망을 지어야 한다는 현실이다. 동시에 ‘AI 강국’을 외치면서 정작 기반시설을 건설할 여력이 부족한 한국 전력산업의 민낯도 드러낸다.

한국은 삼전닉스가 전력망을 깔 공기업의 재무 사정까지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이번 거래에서 더 눈여겨봐야 할 숫자는 25조원이 아니라 그 뒤에 있는 한전의 210조원 부채인지도 모른다.

이심기 수석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