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 출신이 기업에 와서 잘할 수 있는지 궁금해하는데 사실 하는 일이 굉장히 비슷합니다.”
지난 1일 서울대 제1공학관 대강당. 약 300명의 학생 앞에 선 정재헌 SK텔레콤 대표(사진)가 자신의 이력을 소개하며 이 같이 말했다. 서울대 공법학과 87학번인 그는 약 20년간 판사로 일한 뒤 2020년 SK텔레콤에 입사했다. SK스퀘어 투자지원센터장, SK텔레콤 대외협력 사장 등을 거쳐 지난해 10월 법조인 출신으로는 최초로 대표에 올랐다. 약 35년 만에 다시 찾은 모교에서 그는 “감개무량하다”는 소회를 털어놨다.
정 대표는 판사와 기업 임원이란 두 직업을 관통하는 키워드로 ‘판단’을 꼽았다. 판사 앞에 피고와 원고가 저마다 주장과 증거를 내놓듯 대기업 임원에게도 각 부서별 자료와 의견이 수없이 올라온다. 이를 충분히 소화해 어느 방향으로 갈지 결정하는 일이 닮았다는 얘기다. 그는 “무엇이 가장 올바른 의사 결정인지 판단해야 하는데 대표는 결과까지 좋아야 한다”고 했다.
판사에게는 법조문과 판례라는 정답이 있지만 지금 기업인으로서 맞닥뜨린 문제는 그렇지 않다. 인공지능(AI)이 대표적이다. 정 대표는 “우리는 지금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느냐”고 화두를 던졌다.
그는 “누구나 똑같이 주어진 하루 24시간이지만 AI를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240시간, 2400시간이 될 수 있다”며 “AI가 시간의 밀도를 바꾸고 있다”고 설명했다. 산업혁명이 인간의 근육을 몸 밖으로 꺼냈다면 AI는 처음으로 인간의 ‘머리’를 밖으로 꺼내고 있다는 것이다.
정 대표와 SK텔레콤에도 AI는 기회라기보다 생존의 문제에 가깝다. SK텔레콤이 AI 데이터센터와 거대언어모델(LLM), AI 에이전트에 투자하며 ‘AI 풀스택’ 기업으로 변신하려는 이유다. 이 같은 혁신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그는 이를 ‘인공지능 전환(AX)의 J-커브’라고 이름 붙였다. 도입 초기에는 데이터 정비와 업무 재설계 때문에 생산성이 오히려 떨어지지만 ‘불편의 언덕’을 넘어선 순간 가파른 상승이 시작된다는 논리다.
실제 SK텔레콤은 50시간 걸리던 기존 업무를 AI로 전환하기 위해 500시간 넘게 투입했다. AI 에이전트를 새로 개발하고 수백 차례 검증하는 과정을 거쳐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같은 작업이 완료되자 업무 시간이 1시간으로 급감했다.
AI가 일자리를 없앨 것이란 전망에는 선을 그었다. AI 덕에 10명이 하던 업무를 5명이 하게 되더라도 과거 인력과 비용 탓에 엄두를 내지 못한 새로운 일거리를 발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신입 채용을 줄인다면 향후 5~10년 뒤 허리가 사라지는 ‘세대 단절’을 경계했다. 그는 “당장 돈을 아끼려고 인재를 뽑지 않으면 나중에 부메랑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경고했다.
정 대표는 앞으로 10년을 “인류 역사상 가장 예측하기 어려운 시기”라고 고백했다. 그러나 바로 정답이 없다는 게 젊은 세대에게 오히려 기회라고 봤다. 약 35년 전 법대생으로 앉아 있던 강의실에서 그가 남긴 주문도 단순히 답을 찾으라는 게 아니었다. ”질문하고, 생각하고, 사람과 공감하는 힘을 기르라”는 말이 판사 출신 AI 기업 CEO의 마지막 당부였다.
이영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