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 일본이 잃어버린 '청년의 야성'

입력 2026-08-31 17:32
수정 2026-09-01 01:31
1897년 30세의 사카모토 료마는 사쓰마번과 조슈번의 동맹을 주선해 메이지유신의 기틀을 마련했다. 1946년 25세의 모리타 아키오는 소니의 전신인 도쿄통신공업을 창업했다. 1981년 24세의 손정의는 소프트뱅크를 창업해 기존 산업 질서 바깥에서 새로운 정보통신 사업을 일으켰다. 일본을 봉건국가에서 근대국가로, 전쟁 폐허에서 경제 대국으로 끌어올린 힘은 ‘젊은 야성’이었다. 기존 질서에 순응하기보다 무모할 만큼 위험을 감수했고, 안전한 길 대신 불확실성에 자신을 걸었다. 30년 디플레가 만든 안정 지향현재 일본에서 그런 야성은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있다. 사회학자 후루이치 노리토시는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에서 현재 생활에 만족하고 작은 변화도 원치 않는 일본 청년들의 모습을 그렸다. 결혼, 출산을 포기한 채 게임 등 취미와 좁은 인간관계에서 만족을 찾는다. 최근 공개된 ‘2026 한·일 청년 의식 조사’를 보면 일본 청년의 42%가 결혼 생각이 없다고 밝혔다. 한국 청년의 두 배 이상이다.

최근 만난 한 일본 기업인은 이 같은 현상의 분기점을 1985년 플라자합의 이후 시작된 거대한 경제적 굴곡에서 찾았다. 버블 붕괴와 30년에 걸친 디플레이션이 일본인의 야성을 갉아먹었다는 것이다.

오르지 않는 물가, 매뉴얼로 안정된 사회에서 젊은이들은 이직이나 창업보다 제자리를 지키는 편을 택했다. 한번 대기업에 들어가면 평생 고용을 약속하는 사회에서 모험을 할 이유가 점점 사라져갔다.

기업도 비슷했다. 투자보다 현금을 쌓았다. 기존 제품을 끊임없이 개선하는 ‘가이젠’에는 강했지만, 기존 질서를 깨고 새로운 시장을 만드는 능력은 점점 약해졌다. 사전에 이해관계를 조율하는 ‘네마와시’와 촘촘한 절차는 조직을 안정시켰지만, 동시에 속도와 과감함을 떨어뜨렸다. 인플레 시대엔 모험정신 필요하지만 중국의 부상과 인플레이션 사회로의 전환은 ‘현상 유지 선호’를 더 이상 용납하지 않는다. 투자하지 않으면 뒤처지고, 임금을 올리지 않으면 인재가 떠난다. 인공지능(AI)과 공급망 재편으로 산업의 판도 바뀌고 있다. 글로벌 컨설팅업체 맥킨지는 최근 발간한 보고서에서 “일본이 새로운 변곡점에 서 있으며 잃어버린 야성을 되찾지 않으면 영원히 뒤처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일본 내 위기의식도 커지고 있다. 다카이치 사나에 정부는 반도체, 조선, 피지컬 AI, 양자 등 17개 전략 분야에 대규모 국고를 투입하고 민간 투자를 끌어내기 위해 예산 요구 단계에서 상한을 두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30년간 굳어진 관성과 시스템을 넘어 야성을 깨우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다카이치 총리가 ‘재팬 이즈 백’을 외쳤지만 세계는 여전히 반신반의하는 분위기다.

일본만의 얘기가 아니다. 기존의 성공 방식을 놓지 못하고 안정을 택하려는 모습은 이제 한국에도 낯설지 않다. 최상위권 인재들이 의대로 몰리는 현상은 그 단면이다. 가장 뛰어난 인재들이 새로운 기술과 산업에 뛰어들기보다 가장 확실한 자격과 수익이 보장되는 길을 선택하는 사회에서 많은 혁신이 나오기란 어렵다.

일본에 던진 맥킨지의 질문은 한국을 향한 것이기도 하다. 일본은 다시 야성을 찾을 수 있을까. 우리는 아직 그 야성을 갖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