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즈빌시의 전력 사업자인 로즈빌 일렉트릭 유틸리티는 과거 변전소 건설이나 배전망 증설에 필요한 설비를 공사 1년 전에 주문했다. 지금은 3년 전부터 확보에 나선다. 대형 변압기는 납품에 3년 넘게 걸려 5년 뒤 공사에 쓸 물량까지 미리 주문한다.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건설 열풍이 미국 전력 설비 업계에 전례 없는 특수를 맞았다. 미국은 전력망 설비 상당 부분을 수입에 의존하는 가운데 GE버노바와 포젠트 파워솔루션스 등 현지 생산업체는 주문 급증에 맞춰 공장을 증설하고 있다. 수혜는 이튼과 파월 인더스트리스 등 개폐장치·배전설비 업체로도 확산했다. 정체된 전력 수요 때문에 관심 밖으로 밀려난 변압기 산업이 AI 시대 핵심 산업으로 떠오른 것이다.◇빅테크 AI 인프라 투자 급증
31일 글로벌 AI 모델 평가기관 아티피셜 애널리시스에 따르면 아마존·마이크로소프트·알파벳·메타·오라클은 지난해 데이터센터와 AI 반도체·서버 등 관련 인프라에 4090억달러를 투자했다. 전년보다 75% 늘어난 규모다. 올해 목표액은 8270억달러로 다시 두 배 이상으로 증가했다. 전력 수요도 가파르게 늘고 있다. S&P글로벌 산하 451리서치는 미국 하이퍼스케일·임대형·암호화폐 채굴 데이터센터의 계통 전력 수요가 지난해 64.4GW로 2020년의 약 세 배에 이른 것으로 집계했다. 2030년에는 다시 약 세 배인 183.2GW까지 불어날 전망이다.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가 늘면 발전소와 송전망·변전소도 확충해야 한다. 발전소에는 전압을 높여 송전 손실을 줄이는 승압변압기, 변전소에는 전압을 낮추거나 조절하는 전력변압기가 들어간다. 데이터센터 부지와 건물 안에도 배전 변압기와 개폐장치, 차단기, 무정전전원장치가 필요하다. 데이터센터 한 곳이 들어설 때마다 전력망 전반에서 설비 수요가 발생하는 구조다.
기존 생산능력은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우드매켄지에 따르면 미국의 발전소용 승압변압기 수요는 2019~2025년 274%, 변전소용 전력변압기 수요는 116% 증가했다. 승압변압기의 평균 납기는 2024년 143주에서 올해 1분기 160주 이상으로 길어졌다.◇주목받는 미국 기업은미국 업체들은 강력한 수요와 공급자 우위 시장을 함께 누리고 있다. GE버노바의 올해 상반기 전기화 사업부 주문액은 약 134억달러로 전년 동기의 두 배가 됐다. 데이터센터 관련 주문만 50억달러에 달해 지난해 연간 실적의 두 배를 웃돌았다. GE버노바는 지난 2월 변압기 전문업체 프로렉GE의 잔여 지분 50%를 52억7500만달러에 인수해 완전 자회사로 편입했다. 프로렉GE의 노스캐롤라이나주 골즈버러 공장에도 1억4000만달러를 투입해 중대형 변압기 생산능력을 두 배로 늘리기로 했다.
지난 2월 뉴욕증시에 상장한 포젠트 파워솔루션스도 특수를 누리고 있다. 데이터센터와 전력망 등에 들어가는 주문형 변압기와 개폐장치를 생산하며 매출의 40% 이상을 데이터센터에서 올린다. 2026회계연도 3분기 매출은 3억7900만달러로 103% 증가했다. 신규 수주는 8억6700만달러로 308%, 수주 잔액은 19억8000만달러로 157% 늘었고 조정 상각 전 영업이익(EBITDA)도 8500만달러로 96% 증가했다.
포젠트의 경쟁력은 짧은 납기다. 미국에서 변압기와 개폐장치를 함께 생산하고 핵심 공정을 수직계열화해 해외 업체나 대형 경쟁사보다 빠르게 공급한다. 데이터센터 사업자들이 전력 확보 시점을 앞당기기 위해 가격보다 납기를 중시하면서 수주가 급증했다.
변압기 주변 설비업체의 일감도 쌓이고 있다. 변압기와 개폐장치, 차단기, 전력 관리 장비를 공급하는 이튼의 올해 2분기 매출은 85억달러로 전년 동기 대비 21% 증가했다. 미주 전기설비 사업의 최근 12개월 평균 주문은 41%, 수주 잔액은 33% 늘었다. 파월 인더스트리스는 지난 4월 창사 이후 최대인 4억달러 이상의 데이터센터용 설비 계약을 따냈다. 2026회계연도 3분기 신규 수주는 9억3400만달러로 전년 동기 대비 158%, 수주 잔액은 24억달러로 69% 증가했다. 같은 기간 매출과 순이익 증가율은 각각 9%, 8%에 머물렀다. 앞으로 실적에 반영될 일감이 쌓였다는 의미다.
전력 설비 호황을 AI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노후 전력망 교체와 제조업 투자, 액화천연가스(LNG) 시설 및 재생에너지 발전소 건설도 수요를 밀어 올리고 있다. 다만 새로운 수요 증가의 중심은 데이터센터다. 벤 부셰 우드매켄지 선임애널리스트는 “데이터센터는 전력 설비 산업이 지금까지 대응해온 어떤 전력 수요처와도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했다. 우드매켄지는 미국 데이터센터용 전력 설비 시장이 2025년 330억달러에서 2030년 660억달러로 커질 것으로 내다봤다. 공급 부족은 당분간 이어질 전망이다. 마이클 노베브 번스앤드맥도널 선임기술컨설턴트는 “현재 진행 중인 생산능력 증설만으로 향후 5년 안에 미국의 수급 불균형을 완전히 해소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오세성 기자 ses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