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구글이 몰래 개발하는 다음 세대 모델 아니야?”
지난 20일 오픈라우터라는 사이트에 정체불명의 AI 모델 하나가 올라왔습니다. 이름은 ‘옥스 알파(Ox Alpha)’. 개발사 자리에는 회사 이름 대신 ‘스텔스(stealth)’라는 단어만 적혀 있었습니다. 모델 크기도, 구조도, 만든 곳도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사용료는 0원이었습니다.
그리고 딱 일주일 뒤인 26일, 이 모델은 전체 사용량 1위에 오릅니다. 그사이 3억4349만 번 호출됐고 27조2493억 토큰을 처리했습니다. 2위 딥시크 V4 플래시가 12조5000억 토큰이었으니 두 배를 훌쩍 넘습니다. 미국산 중 가장 많이 쓰인 오픈AI의 GPT-5.6 루나는 4조9000억 토큰이었습니다. 다섯 배 넘게 차이가 납니다. 진짜 구글일까이렇게 할 곳이 구글밖에 없다는 얘기가 돌았습니다. 하지만 구글이 아니었습니다. 중국이었습니다. 26일 즈푸AI가 인정했습니다. 옥스 알파는 ‘GLM-5.3 플래시’의 사전 테스트 버전이었습니다. 정식 출시를 앞두고 개발자들의 실제 사용 패턴을 모으려고 오픈라우터에 스텔스 모델로 올렸다는 설명입니다.
크기는 3200억 개 파라미터입니다. 전문가 혼합 구조를 차용해 뇌 전체를 켜지 않고 필요한 부위만 깨우는 방식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수학 문제에는 수학 담당만, 코딩에는 코딩 담당만 동원합니다. 그래서 토큰 하나를 처리할 때 실제로 작동하는 파라미터는 180억 개뿐입니다. 그래픽처리장치(GPU)에 조금 투자한 개인용 컴퓨터면 돌아가는 수준입니다.
즈푸는 이 모델의 웨이트를 MIT 라이선스로 전부 공개해 버렸습니다. MIT 라이선스는 가장 관대한 공개 조건입니다. 상업적으로 써도 되고 고쳐서 팔아도 됩니다. ‘나오면 세상이 위험해진다’며 철저히 비공개에 부치는 미국 기업과는 정반대입니다. 성능은 8할, 가격은 100배 싸성능부터 보겠습니다. 옥스 알파는 종합 지능 지수 57점을 받았습니다. 오픈AI GPT-5.6 테라와 비슷하고 구글 제미나이 3.7 플래시보다 앞섭니다. 코딩과 에이전트 작업에서는 클로드 오퍼스 4.8급이라는 평가가 나왔습니다. 앤트로픽 최상위 모델인 페이블 5는 같은 계열 지표에서 62.1점입니다. 정상은 여전히 미국 몫이지만 격차가 압도적이지는 않습니다
가격까지 고려하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GLM-5.3 플래시는 100만 토큰을 입력하는 데 0.15달러(한화 약 210원), 출력에 0.50달러(한화 약 700원)를 받습니다. 페이블 5는 입력 10달러(한화 약 1만4000원), 출력 50달러(한화 약 7만원)입니다. 입력은 67배, 출력은 정확히 100배 차이입니다. 성능이 8할이나 9할쯤 되는데 가격은 100분의 1인 겁니다. 중국의 승리?중국 모델이 가격으로 사용량 상위권을 쓸어 담는 것 자체는 새로운 일이 아닙니다. 오픈라우터 상위 10위를 보면 일곱 자리가 중국 모델입니다. 미국 모델은 엔비디아와 오픈AI, 구글이 한 자리씩 지키고 있을 뿐입니다. 미국은 그간 가성비를 내세운 중국의 전장에서 정면 승부하지 않겠다는 태도였지만, GLM-5.3 플래시의 화려한 등장에 손만 놓고 있기는 어렵다는 분석도 나옵니다.
물론 미국의 방향성은 조금 다릅니다. 수학 난제를 풀었다거나 신약 후보 물질을 찾아냈다는 식의 성과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더 크고 더 강력한 모델로 바이오와 과학, 제약 같은 응용 문제를 풀겠다는 전략입니다. 그런데 앞서 본 순위표에 페이블 5는 없습니다. 오퍼스 5와 소네트 5는 19위 안에 들어 있는데 정작 최상위 모델은 보이지 않습니다. 위험하다고 그렇게 강조한 모델들이 막상 풀어놓고 보니 쓰는 사람은 그만큼 적었다는 뜻입니다.
똑똑하다고 전부는 아냐초기 AI 경쟁은 지식을 얼마나 많이 채워 넣느냐의 싸움이었습니다. 모델을 키우면 더 많은 정보가 들어간다고 봤고, 그래서 계속 키웠습니다. 어마어마한 메모리와 GPU와 전기가 그 논리로 정당화됐습니다. 이른바 스케일링의 시대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키워도 모델은 여전히 없는 사실을 지어냈습니다. 머릿속에 든 지식이 많다는 게 생각만큼 결정적인 무기가 아니었던 겁니다.
지금 경쟁의 무대는 에이전트로 넘어왔습니다. 에이전트에게 내부 지식은 상대적으로 덜 중요합니다. 모르는 건 웹에서 검색하면 되고 자료는 데이터베이스에서 꺼내면 됩니다. 필요한 건 다른 능력입니다. 무엇을 찾아볼지 정하고, 어떤 도구를 쓸지 고르고, 찾아온 것들을 어떻게 조합할지 계획하는 능력입니다. 여러 단계로 이어지는 행동을 순서대로 잘 해내면 됩니다.
에이전트 모델은 점점 작아질 겁니다. 지금 초거대 모델이 내는 성능을 머지않아 개인 PC에서, 어쩌면 웹브라우저 안에서 돌아가는 모델이 낼 겁니다. 옥스 알파가 일주일 동안 보여준 것이 그 예고편이었다는 평가입니다.
허진 기자 hj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