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국채의 ‘톱 세일즈맨’을 자처하는 스콧 베선트 재무장관이 고군분투 중이다. 중동 산유국들과 통화스와프 체결을 협의하고 있고, 일본 정부와는 엔화 가치 방어를 위한 공동 개입에 나섰다. 미 국채 주요 투자자인 이들 국가가 자국 금융 안정을 위해 미 국채를 투매해야 하는 상황을 막기 위한 고육지책이다. 그럼에도 30년 만기 국채 금리가 19년 만에 최고치로 치솟자 지난주 재무부의 국채 재매입 규모를 두 배로 확대하겠다고 발표했다. 발표 직후 급락한 국채 금리는 딱 하루 만에 제자리로 돌아왔다. 월가는 베선트의 가격 개입은 미국의 부채 상황이 지속 가능하지 않음을 자인한 꼴이라며 비판을 쏟아내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가격, 미국 국채 금리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보통 투자자들은 만기가 긴 채권에 추가 금리를 요구한다. 오래 보유하는 동안 일어날 수 있는 각종 리스크에 대한 보상 차원이다. 이를 ‘기간(term) 프리미엄’이라고 부른다. 미국 장기 국채에는 오랫동안 기간프리미엄이 붙지 않거나 마이너스였다. 물론 3년 만기보단 10년 만기, 30년 만기의 금리가 높지만, 미래 예상 기준금리를 반영하는 수준에 그쳤다. 미국 국채에는 과도한 인플레이션, 무분별한 채권 발행 같은 국가 리스크가 없을 것으로 본 것이다. 미국 중앙은행(Fed)이 양적완화를 통해 국채를 무제한 매입한 영향도 컸다.
미국 국채에 기간프리미엄이 부활한 건 2023년 가을이다. 재무부가 재정적자를 메우기 위해 장기 국채 발행량을 대폭 늘리겠다고 발표하면서다. Fed의 기준금리 인상 사이클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는데도 10년 만기 금리가 연 5%를 넘어섰다. 시장은 이때부터 미국의 부채 위기 가능성을 본격적으로 국채 가격에 반영하기 시작했다. 2024년 하반기 대선 국면에서 기간프리미엄은 확연한 플러스로 돌아섰고, 도널드 트럼프 2기 집권 이후엔 구조적 현상으로 고착화했다. 미 정부의 부채는 얼마 전 40조달러를 돌파했고, 이번 회계연도의 국채 이자 지급 비용은 국방비보다 많은 1조1000억달러를 넘어설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미국이 곧 부채위기에 처할 것이며 이는 패권국가 빅사이클의 마지막 단계에 접어든 징조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전설적 헤지펀드매니저 레이 달리오가 대표적이다. 기축통화의 이점을 활용해 값싸게 빌린 돈으로 힘을 유지하던 패권국이 부채 누적에 따른 자본 비용 급증으로 쇠락하는 사이클이 역사적으로 반복됐다는 것이다. 중국과의 인공지능(AI) 패권전쟁이 결국 자본 전쟁이라는 점에서 달리오의 예언은 설득력이 있다. AI 인프라 구축에 미국 하이퍼스케일러들이 수조달러를 투입해야 하는 상황에서 높은 장기 금리는 치명적 약점이다. 이들이 쏟아내는 장기 회사채와 미국 국채가 시장에서 경쟁하며 금리는 계속 높아질 가능성이 크다.
한국 역시 글로벌 AI 패권 전쟁의 참전국이다. 그런데 시장 금리 상승으로 우리 기업의 자본 조달 비용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미국과 한국은 고령화와 복지 지출 급증이라는 만성질환을 똑같이 앓고 있다. 정치인들이 무서운 속도로 늘어나는 빚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도 판박이다. 역대 최대 규모 추가 세수의 일부만이라도 빚을 갚는 데 쓰라는 재정 전문가들의 제안을 “바보짓”이라며 일축한다. 베선트 장관의 헤지펀드 스승인 스탠리 드라켄밀러는 최근 월스트리트저널 기고문에서 “신뢰할 수 있는 재정 패키지가 국채 재매입 프로그램의 1000배 규모보다 장기 금리 안정에 훨씬 더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썼다. 잠재성장률 반등의 출발점은 돈풀기가 아니라 건전 재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