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와 전기차 확산으로 구리 수요가 급증하는 가운데 국내 연구진이 구리 사용량을 절반 수준으로 줄이면서 부식에는 강한 신소재를 개발했다. 데이터센터 전력설비와 전기차, 해양플랜트 등 구리를 많이 쓰는 산업에 적용하면 원료 비용과 교체 비용을 함께 낮출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아주대학교는 김종현 응용화학과·대학원 분자과학기술학과 교수 연구팀이 전도성 고분자인 폴리아닐린(PANI)을 활용해 '폴리아닐린-구리 하이브리드 전도성 복합소재'를 개발했다고 27일 밝혔다.
이 소재는 질량의 절반가량만 구리이고 나머지는 값싼 유기 원료로 만든 폴리아닐린 골격이다. 연구팀은 폴리아닐린의 산화·환원 상태를 정밀하게 조절해 구리와 결합시켰다. 환원도가 높아질수록 구리와 결합하는 아민기 밀도가 늘어나면서 구리 입자가 고분자 내부에 미세하고 균일하게 분산되는 원리다.
복합체는 10⁴S/㎝ 이상의 금속성 전기전도도를 유지하면서 부식 저항성에서는 순수 구리를 크게 앞섰다. 순수 구리가 바닷물에 담근 지 240시간 만에 전기저항이 약 3만 배로 치솟아 전극으로 쓰기 어려운 수준이 된 반면, 복합체는 960시간이 지난 뒤에도 정상 작동했다. 부식 속도도 순수 구리의 약 9분의 1 수준으로 억제됐다.
연구팀은 이런 성능의 원인을 '희생 산화 메커니즘'으로 규명했다. 폴리아닐린이 구리 대신 먼저 산화되면서 구리를 보호하는 방식으로, 선박이나 해양 구조물에서 특정 금속을 먼저 부식시켜 본체를 지키는 '희생 전극'과 비슷한 원리다.
다만 완전히 환원된 형태인 '류코에메랄딘 베이스'를 썼을 때만 보호 효과가 나타나, 고분자의 산화·환원 상태가 성능을 결정하는 핵심 설계 변수인 것으로 확인됐다.
구리는 AI 산업 확대로 전략적 중요성이 커지고 있는 원자재다. 문제는 사용량을 단순히 줄이면 전도성이 떨어지고, 부식을 막기 위해 별도 코팅을 입히면 공정이 복잡해지면서 비용이 늘어난다는 점이다.
연구팀은 금이나 은 같은 값비싼 귀금속 없이 아닐린과 구리염 등 범용 원료만으로, 단일 화학 환원 공정을 통해 두 문제를 동시에 해결했다. 대량생산에도 유리하다는 게 연구팀 설명이다.
상용화 작업도 시작됐다. 연구팀은 특허를 출원했고, 연구에 참여한 고분자 전문기업 엘파니가 양산을 위한 후속 개발을 진행하고 있다. 연구팀은 데이터센터 전력설비와 전기차를 우선 적용 대상으로 추가 검증에 나서는 한편 전도성 잉크와 전극, 해양플랜트 부품 등으로 활용 범위를 넓힐 방침이다.
김 교수는 "구리 확보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얼마나 적게 쓰고 오래 쓰느냐가 자원 경쟁력이 된다"며 "구리 사용량과 부식 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대체소재의 가능성을 보여준 연구"라고 말했다.
이번 연구 결과는 국제학술지 '어플라이드 서피스 사이언스 어드밴시스' 8월호에 실렸다. 김 교수가 교신저자, 이은혜 아주대 분자과학기술학과 석·박사통합과정생이 제1저자로 참여했다.
수원=정진욱 기자